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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Apr 08. 2021

<더 파더> 혼란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지다

<더 파더>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의 한 집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던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그를 찾아온 딸 '앤(올리비아 콜맨)'은 돌연 자신이 파리로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앤이 나이 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게 힘들어서 자신을 떠나려고 한다면서 불평을 내뱉는 안소니는 본인이 애지중지하는 손목시계를 찾으며 방문을 닫고 앤과의 대화를 거부한다. 그러다 집에서 낯선 소리를 듣고 문 밖으로 나가 본 그는 큰 딸과 사위, 작은 딸과 간병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기억하던 것과 전혀 다른 이상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고, 본인의 현실, 기억, 더 나아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매년 2월 전후(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올해는 4월 전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많이 공개된다. 거대한 스펙터클과 막대한 제작비를 자랑하는 블록버스터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경우가 많은 이 영화들은 주로 한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관찰하고 따라가며 관객들이 자연히 그에게 공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은 대게 두 가지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시간 순서에 맞춰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인과관계로 묶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과거의 사건을 궁금하게 만들고, 인과관계를 역순으로 보여주면서 몰입도를 높이는 것이다.

 


<더 파더>의 첫 장면은 이러한 관습적인 전개를 자연히 기대케 한다. 안소니와 앤의 대화를 지켜보다 보면 남은 러닝타임 동안 어떤 에피소드가 등장할지 예상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기억을 잃어가는 안소니와 그를 부양하는 앤의 모습은 그들이 겪었고 앞으로도 겪어야 할 갈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한 앤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드는 여동생과 관련된 과거의 비극, 앤소니가 집착 수준으로 소중히 여기는 손목시계에 담긴 그만의 인생사까지 영화는 특정 대사나 제스처, 소품 등을 강조하며 부녀의 사연을 보여줄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더 파더>는 두 개의 길 중 어떤 것도 걷지 않으면서 모든 예상과 기대를 벗어난다. 영화는 분명 첫 장면 이후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사건들의 내용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안소니가 만나는 앤과 사위, 새로운 간병인은 매번 서로 다른 배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파리에서 살 것이라던 앤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며 안소니를 타박한다. 또 안소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책임지기 위해 간병인을 고용하던 앤은 갑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극심한 원망을 표출한다. 바로 앞선 장면이 다음 장면을 부정하고 또 바로 다음 장면이 앞선 장면을 부정하며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그 결과 도통 안소니의 현재 상태와 그의 과거 사연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고, 혼란에 빠져버린다. 



혼란은 영화 내내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손목시계와 문이라는 소품을 활용해 시공간을 뒤집어 놓는 연출 덕분에 금세 공포로 변한다. 우선 안소니는 딸을 비롯한 주변 인물의 배우가 변할 때마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찾으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가늠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언제나 손목에 존재하지 않는 시계는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대표적인 장면이 안소니와 앤, 사위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다. 그는 딸 내외가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야 할지 의논하는 순간을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을 걸어 시간의 루프에 빠뜨린 것 마냥 반복해서 접하며 큰 충격을 받는다. 


또한 영화는 안소니가 문을 열고 자신의 방과 같은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때 문 너머의 공간은 시간이 꼬이고 반복되는 것만큼이나 안소니에게 혼란과 공포를 준다. 방에 있다가 문을 열었더니 집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병원이라서 갑자기 진료를 받거나, 딸과 사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하는 말이 정반대로 달라지거나, 자신을 위협하는 일이 똑같이 발생하는 등 예상할 수 없는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손목시계와 문을 활용한 연출은 관객과 안소니가 처한 상황, 그들의 혼란스러움과 충격, 그로 인한 공포를 일치시키며 긴장감과 몰입도를 극도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칸트가 부정할 수 없는 선험적 감성형식으로 제시한 형식인 시공간은 현상을 경험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에, 안소니는 자신의 시공간이 무너지는 가운데 이를 어떻게든 복구하려고 발버둥 친다. 이때 안소니의 시점에서 영화라는 세상을 따라가는 관객에게 그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붕괴는 남의 일이 아니기에 그가 느끼는 여러 감정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야기가 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만큼 그를 러닝타임 내내 가득한 혼란을 헤쳐나갈 기준점, 북두칠성으로 삼은 채 그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혼란스러움과 의아함, 더 나아가 두려움을 느끼는 관객에게 영화는 마지막 공간, 보육원 병실에서 지내는 안소니의 모습을 탈출구로 제시한다. 엉망진창이었던 영화의 모든 내용이 단지 자신의 담당 간호사와 방도 알아보지 못하고 딸이 자신에게 보낸 엽서도 못 알아볼 정도로 치매를 앓고 있는 한 노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려준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 상황, 이미 떠나보낸 사람과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이 모조리 뒤섞인 자신만의 기괴한 현실에 갇혀버렸던 그의 내면이 약 90분 간의 혼란과 공포의 원인이자 결과였던 것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혼란과 의아함을 품은 채 밀려들었던 공포의 파도가 빠져나간 관객의 해변가에는 홀로 남은 그의 고독함과 쓸쓸함만이 존재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안타까움과 연민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이 모든 감정을 "내 잎들을 모두 잃고 있는 거 같아(I feel as if I'm losing all my leaves)"라는 안소니의 대사와 대비되는, 그의 병실 밖에 수북이 자란 파아란 나무들의 잎사귀들 하나하나에 담은 채 끝난다. 


이처럼 마치 주인공 옆에 서서 그와 하나 되어 그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더 파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연상시킨다. 단지 <그래비티>가 촬영과 CG, 배우의 연기가 조합된 체험하는 영화라면, <더 파더>는 촬영과 CG를 관습과 예상, 기대를 전부 벗어난 각본의 힘으로 대신했을 뿐이라는 점만 다르다. 



<더 파더>는 약 3주 뒤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각색, 남우주연, 여우조연, 편집, 미술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이는 간호사를 엄마 삼아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리는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 엄청난 공포와 혼란스러움을 한 순간에 연민과 고독함으로 뒤바꾼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각본과 연출력을 볼 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하지만 설사 시상식의 후보로 선정되지 않았어도 이 작품이 지닌 가치가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고, 또 언젠가는 닥치게 될 일들을 짧은 순간이나마 내 일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더 파더>는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4dx가 아니어도 사실감, 몰입감, 현장감, 감정선을 모두 잡는 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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