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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ul 09. 2021

<트립 투 그리스> 오디세우스의 두 발자국을 쫓다

<트립 투 그리스>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 유명 배우 '스티브(스티브 쿠건)'와 '롭(롭 브라이든)'은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6일 동안의 그리스 여행에 나선다. 터키 아소스를 시작으로 이타카에 이르기까지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둘은 동시에 레스보스 섬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의 유래, 델포이 신전에서는 신탁을 받는 방법,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차이 등 온갖 주제로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해 토론과 농담을 나눈다. 이처럼 유쾌하던 여행은 스티브가 아들의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고 롭이 아내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는 찰나에 뭉클한 인생 여정으로 변모한다. 


2010년 <트립 투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트립 투 이탈리아>와 <트립 투 스페인>을 거쳐 2021년 <트립 투 그리스>로 이어지는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시리즈는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작품이 아니다. 마치 <꽃보다 청년> 시리즈를 영화관에서 보는 듯한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보는 풍광과 즐기는 음식,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그들 바로 옆에서 함께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인 <트립 투 그리스>도 다르지 않다. 여름날 에게 해의 바다를 수영하는 행복, 다 무너져가는 델포이 신전에서 안개 낀 그리스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벅참과 허무함, 그리스의 자랑인 꿀술에 곁들인 다양한 해산물과 육류 요리의 향연은 당장 영화관을 박차고 그리스로 날아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와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 모든 경험을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즐기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국적인 도시와 매력적인 레스토랑, 맛있는 음식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의 향연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알쓸신잡> 마냥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스워즈,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셸리,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와 같이 특정 인물을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전작들처럼, <트립 투 그리스> 역시 터키 아소스에 위치한 트로이 유적지로부터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를 대표할 수 있는 수많은 인물들과 영웅들 중 굳이 오디세우스를 여행의 나침반으로 선정한 것은 <트립 투 그리스>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자타공인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의 시조 테세우스를 비롯해 아르고 호의 원정을 이끈 이아손의 행적을 따라가더라도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장소를 둘러보는 데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이 겪는 서로 다른 모습의 삶에 담겨 있다. 



성공에 대한 야망이 가득해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던 스티브는 어느새 성인이 된 아들로부터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다. 즐거운 여행과 로맨스를 즐기다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빠진 스티브에게 이제 그리스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저승세계의 입구로 여겼다는 동굴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아버지 대신 스틱스 강의 뱃사공 카론이 모는 나룻배를 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고, 밤에는 영혼들이 영원히 떠돌아다닌다는 아스포델 들판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악몽까지 꾼다. 결국 마지막 목적지인 이타카로 향하던 중 부고를 접한 스티브는 급히 아들이 있는, 20년 전에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돌아간다. 


한편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는 롭은 일주일 여행을 떠난 것에 불과한데도 끊임없이 가족을 그리워한다. 낮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딸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그는 자신만이 그리스의 미를 즐기는 것이 불편하고, 잠시 집을 떠난 사이 더욱 커지는 아내의 빈자리를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티브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아내를 마지막 목적지였던 이타카로 불러 멋진 재회를 즐기고, 그녀와 함께 여행을 계속하며 그토록 바라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한다.  


 

이러한 스티브와 롭의 이야기는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를 구성하는 두 모티브를 각각 나누어 재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집으로 가고 싶은 지친 여행자이면서 호기심 가득한 열정적인 여행자라는 두 개의 모티브가 겹쳐진 영웅이고, 그래서 선역도 아니고 악역도 아니며 매우 입체적이고 인간적이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우선 디세우스는 지친 여행자다. 단순히 트로이에서 10년을 보내고, 바다에서 10년을 떠돌았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 끝에 다다른 항해 중 잠시 들른 저승에서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의 혼을 만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깊은 슬픔에 빠지기 때문이며, 갓난아기 이후로 보지 못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지탱해야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중 스티브는 이러한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동시에 오디세우스는 열정적인 여행자다. 그는 키르케와 칼립소가 제안하는 안정적이고 죽지 않는 삶을 마다하고 바다로, 이타카로, 아내를 향해 끊임없이 항해한다. 어떤 괴물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리워하던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고, 그녀를 괴롭히던 모든 구혼자들을 죽이고 행복을 누릴 때까지 결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이 오디세우스는 유머와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스티브의 여행까지 이어받은 롭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중요한 것은 스티브와 롭의 서사로 나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하나로 합쳐서 들여다볼 때, <트립 투 그리스> 속 주인공들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디세우스가 그리스의 모든 영웅들과 가장 다른 삶을 추구한 영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그를 그리스인 중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이고, 그렇기에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일주일 간의 여행으로 축약시키는 이 영화가 본보기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그리스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그가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목표가 다르다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와의 만남과 이후 그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만난 아킬레우스에게 살아생전에 가장 위대한 전사였고 그 이름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서 영원히 빛난다고 위로를 건넨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디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라고 답한다.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한탄을 들은 후 오디세우스는 옛 전우의 말대로 살아간다. 칼립소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귀향하여 페넬로페와 함께 이승에서의 시간을 행복하고 값지게 살아나간다. 


이때 '칼립소(kalupso)'라는 이름이 그리스어로 '감추는 자'라는 뜻임을 고려하면, 오디세우스가 영원히 살되 세상에서 잊히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거부했음을, 대신 아킬레우스가 말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삶의 의미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던 그리스 영웅들과는 달리 지금 당장의 삶의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친 영웅인 것이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신화 속 인물들과 달리 인간적이고 소박한 면모를 가졌고, 그 어떤 영웅들보다 현대인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두 주인공이 오디세우스의 발자취를 따르는 건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여행 중 현재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여행의 끝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결국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가장 먼저 경험한 그리스인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트립 투 그리스>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삶을 답습하는 것을 벗어나서 그의 여행을 현실적인 범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스티브가 영화 촬영 당시 자신을 도왔던 스태프를 만나 난민 캠프로 가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나먼 남의 땅에 와서 기약 없는 생활을 지속하고, 지중해 온갖 곳을 표류하며 집 없이 전전긍긍하며, 정착할 수 있는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난민들의 모습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한 남자를 닮았다. 이때 대본 없이 실제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현지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원터바텀 감독의 연출은 그리스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영화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스며들도록 유도하면서 더 크고 짠한 울림을 남긴다. 


물론 <트립 투 그리스>의 모든 점이 좋지는 않다. 차 안에서 서로 자신이 가성을 더 잘 쓴다면서 '그리스'의 테마곡 'Grease is the word'를 부르는 장면처럼 두 배우의 상황극이나 농담이 과하게 길어지는 순간에는 극본 없이 배우들의 역량을 믿는 윈터바텀 감독의 스타일이 성공과 실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듯 보인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는 하지만, 또 그렇기에 안정된 형식의 부재가 낳는 태생적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그리스 신화나 비극, 역사 등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의 차이에 따라 만족도가 널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점들이 그리스 여행이라는 코스 요리를 즐기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을 가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두 배우의 여행과 대화가 선사하는 낭만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그리스 최초의 현대인을 따라 걷는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트립 투 그리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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