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버그>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레 tv '파본자들' <세버그> 편의 방송 내용을 재정리한 글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누벨바그의 스타로 활동하던 영화배우 '진 세버그(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녀는 영화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오던 비행기에서 흑인 인권 운동가 '하킴 자말(안소니 마키)'을 만난다. 하킴의 모습에 묘하게 끌린 그녀는 그를 통해 흑인 인권 운동에 자금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 때문에 FBI의 표적이 된다. 안 그래도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던 60년대 후반에 FBI 입장에서는 진의 반정부적 행보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결국 FBI는 신입요원 '잭(잭 오코넬)'에게 진을 24시간 감시하고 더 나아가 그녀의 명예와 경력을 망가뜨릴 공작을 꾸미기 시작한다.
실존 인물이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실화의 재현이라는 과제 앞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정적인 러닝타임 내에서 복잡한 실제 사건을 온전히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화를 다루는 영화는 흔히 중심 소재가 될 인물 혹은 사건의 특정 면모를 부각하고, 작가의 해석을 기반으로 세부 요소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소셜 네트워크>와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두 영화는 사실 관계에 있어서 왜곡된 지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법정 싸움과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마크 주커버그와 스티브 잡스라는 유명인의 덜 알려진 개인사를 임팩트 있게 재구성하여 호평받은 바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버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세버그>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했고, 1960년대에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FBI의 감시 대상이 되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 영화배우 진 세버그의 다채로운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문제는 영화가 묘사하는 진 세버그의 모습이 철저히 FBI라는 공권력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진 세버그의 첫 등장 장면부터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진 세버그의 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세버그의 첫 장면은 진이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성 잔다르크>(1957)에서 잔다르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습이다. 이때 영화 카메라는 십자가 쇠사슬로 결박된 채 화형을 기다리고, 불이 올라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잔다르크를 계속해서 비춘다. 마치 진 세버그가 앞으로 당할 많은 고통들을 암시하는 듯이. 이에 더해 영화 카메라가 한 사람이 고통을 가감 없이 찍듯이, 그녀 역시 FBI와 언론의 카메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왜 사회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흑인 인권 운동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더 편안한 삶을 뒤로한 채 고난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함구한다. 그저 그녀에게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원래부터 있었다는 식의 묘사를 제외하면, 사회운동가로서의 진 세버그의 신념, 사상, 가치관을 탐구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외의 장면에서 진의 모습은 계속되는 도청과 감시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의 반복에 머무른다. 그나마 도입부 남편과의 대화에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68 혁명이 그녀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 대신 평면적인 이미지로 고정된 진 세버그의 빈자리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에게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진 세버그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정작 세버그는 문제의 발단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고,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상의 인물인 잭 솔로몬을 통해서 제시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당장 잭의 첫 등장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 속 그가 진 세버그와는 달리 상당히 깊은 내적, 철학적 갈등을 겪게 될 것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잭은 새롭게 발령받은 FBI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잠깐 언쟁을 벌이며 자신의 최애 만화책인 <캡틴 아메리카> 1편을 버리려는 아내를 만류한다. 잭이 캡틴 아메리카의 팬암을 알려주는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작중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영웅은 이제 영화를 통해서도 익숙한 인물이지만, 이름대로 미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가 상징하는 자유라는 이념과 권리를 위해 움직이는 슈퍼히어로다. 따라서 캡틴 아메리카 만화책 에피소드는 진 세버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공권력이 한 개인을 대상으로 공작을 펼치는 작전에 투입되는 잭이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겪게 될 내적, 외적 갈등을 함축해 보여준다.
물론 진 세버그에 대한 평면적 묘사와 잭의 고민을 함께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버그>가 50여 년 전 사건으로부터 시사점을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FBI와 언론의 유착 관계로 인해 억지로 만들어진 스캔들이 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습은 최근 몇 년간 뜨거운 감자였던 가짜 뉴스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FBI의 감청 및 감시 행위는 자연히 공권력과 개인의 관계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느 범위까지 제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또 최소한 도청장치를 찾을 수는 있는 진과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감시당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식조차 못할 세상을 사는 입장에서 <세버그>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단지 가상의 인물이 이처럼 흥미로운 주제와 메시지와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 세버그의 이름을 걸고도 그녀의 삶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괴리감은 영화의 메시지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 문제를 낳는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배우 개개인의 퍼포먼스다. 실제로 가상 인물인 잭 솔로몬의 비중이 상당히 높고, 진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진 세버그라는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맨발로 등장하거나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공개하는 배우 본인의 용기와 이미지를 자신을 사찰하는 정부 기관과 정부의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는 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캐릭터의 강인함에 적절히 투영한 후반부 기자회견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킴 자말 역을 맡은 앤소니 마키가 돋보이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세버그>는 상술했듯이 인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실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많지 않은 작품이다. 이때 MCU에서 팔콘, 그리고 2대 캡틴 아메리카 역을 맡아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던 안소니 마키의 이미지는 본래 영화가 해야 할 설명을 대신하는 듯 보인다. 배우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린 덕분에 많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킴 자말은 흑인 인권 운동가로서 첫 등장부터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진의 행동과 대사에 개연성을 추가적으로 불어넣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세버그>와 유사한 시간대의 실화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최근 몇 년 사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흑인 인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 다소 혼란스러웠던 미국 사회상과 그 안에서 각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의 모습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나 <트라이얼 오브 시카고 7>과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어야 할 세버그를 단순한 피해자로 묘사할 뿐인 <세버그>는 위의 작품들과 달리 당시 사회상에 대한 통찰이나 비판, 진 세버그에 대한 재해석 대신 그저 배우들의 열연만 기억에 남는 실망감을 선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