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야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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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그룹 회장의 혐의를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 검사 '한지훈(박해수)'은 원하던 결과를 내는 데 실패하고, 그 대가로 국정원 파견 검사로 좌천된 후 국정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그에게 원대 복귀의 기회가 찾아온다. 전 세계 스파이의 최대 접전지 선양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해외 비밀공작 전담 블랙팀의 보고서가 전부 가짜인 것으로 밝혀지고, 한지훈은 내막을 파악할 특별감찰관으로 파견된다. 선양에 도착한 그는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일명 ‘야차’로 불리는 '지강인(설경구)'과 그의 팀을 의심하며 감시하고, 강인과 블랙팀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임무를 진행한다. 그러던 중 지훈은 보고서에 기재될 수 없었던 블랙팀의 진짜 임무를 알게 되고, 동북아 첩보전의 중심에 발을 내딛는다.
냉전 시기에도, 냉전이 끝난 후에도, 그리고 신냉전의 초입에서도 남한과 북한은 언제나 갈등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쉬리>, <의형제>, <베를린>, <용의자> 등과 같은 한국 첩보 영화는 남북 관계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남침한 북한 스파이와 남한 정보 요원 간의 치열한 액션과 정보전, 그리고 쉽사리 형언하기 힘든 우정의 형성은 마치 하나의 클리셰처럼 굳어졌다. 그래서일까? 최근 한국 첩보 영화는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해 왔다. 남침한 북한 스파이가 아닌 북침한 남한 스파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공작>), 남과 북 사이의 첩보전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국 간의 이해타산을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강철비>)도 그 일환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야차>도 궤를 같이한다. <프리즌>을 연출한 나현 감독의 신작은 전 세계 스파이의 최대 접전지로 설정된 중국 선양을 배경 삼아 남다른 스케일과 이국미를 뽐낸다. 또 남북 관계를 탈피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끼칠 다른 국가들의 첩보전에도 상당한 비중을 부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국가의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한다고 볼 수도 있는 스파이와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통찰도 담고 있다. 다만 변화를 위한 <야차>의 노력은 그저 제자리걸음 하는 데 그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포부에 걸맞지 않은 허술한 디테일과 짜임새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이자 모티브인 '야차'의 의미를 살펴보면, <야차>가 첩보영화로서 풀어내고자 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인도 신화와 불교에 나오는 귀신 중 하나인 야차(夜叉)는 사람 잡아먹는 추악하고 잔인한 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작중 야차는 지강인의 별칭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야차>가 첩보 영화라는 점과 지강인과 한지훈이 각각 국가의 권한을 일부 위임받아 활동하는 스파이이자 검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야차'는 마치 토마스 홉스가 국가 권력을 성경 속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것처럼 국제 관계 속 국가에 대한 은유 같기도 하다. 국가는 야차의 추악한 면과 선한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주인공의 조합은 국가의 이중성을 의인화하고 있다. 지강인은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기존 첩보 액션 장르의 젠틀한 주인공들과 달리 무자비하고 잔혹하며, 거칠고 무례하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폭력과 협박도 불사하는 그는 의인인지 악인인지 분간이 어려우며, "정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지켜내야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국제 질서 속 국가들의 모습을 의인화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강제력이나 구속력 있는 규범이 현실적으로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각 국가들의 정의는 결국 자국의 이익 추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강인과 같은 첩보요원, 스파이는 이익이라는 정의를 쫓는 야차의 추악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한지훈은 야차의 고고한 면, 원칙과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첫 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지훈 검사는 뇌물 공여 및 주가 조작 혐의로 소환된 재벌을 수사하면서 반드시 혐의를 밝혀내겠다고 벼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욕과는 별개로 휘하 수사관들이 위법한 방식으로 증거 수집을 했음을 알게 되자 수사를 포기한다. "도둑놈 잡으려고 도둑질했어. 저것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정의는 정의롭게 지켜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판사 대신 사회 질서와 원칙, 법, 정의를 파괴하는 이들을 직접 심판대에 올리는 검사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특별감찰관으로서 지강인과 그의 팀이 사용하는 수단이 정당한 지를 거듭해서 감시한다.
야차의 이중적 의미는 이 작품이 첩보물이자 동시에 버디 영화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강인과 한지훈의 대립 구도는 본질적으로 야차의 이중성이 충돌하는 것이고, 결국 국가의 역할과 기능 앞에 놓인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어 첩보물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둘의 관계와 관계성이 바뀌는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강인과 지훈의 육탄전이 되기도 하고, 코미디에 가까운 기싸움이나 대화 장면에서 은연중에 가치관의 대립이 드러나기도 하고, 아예 정보전의 양상을 뒤바꾸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복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야차>는 이를 정석적으로, 또 정반합적으로 풀어낸다. 우선 초반부는 지강인과 블랙팀을 만난 지훈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훈이라는 인물의 신념은 정당한 수단이 정당한 결과를 낳는다는 통념과 상식에 보다 부합한다. 그래서 영화는 그가 선양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의 시선으로 작전 내용이나 인질 대우 방식, 블랙팀의 운영 체계를 살펴보게 하면서 강인과 지훈 간의 갈등과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고조시킨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오프닝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난 지강인의 과거, 그리고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강인과 팀원들의 치열한 사연을 토대로 물음을 던진다. 정의라는 목적만큼이나 수단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지훈의 시각에 거듭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강인과 지훈이 서로의 비판과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두 인물이 파트너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실제로 한지훈은 잡아넣는 데 실패했던 재벌 그룹 회장을 기어코 구속 수사하는 데 성공하는데, 이를 두고 동료 검사는 명분 만을 강조하던 지훈이 마침내 변했다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지강인 역시 지훈에게 법과 원칙을 개뼛다구로 보는 놈들을 찾았다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건다. 두 인물은, 곧 야차는 합동 작전을 수행한 끝에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을 두고 마침내 합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야차>는 제목과 모티브에 버디 영화와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재미를 더해 큰 그림을 그려낸다.
문제는 가치관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고, 차이 대신 공통점을 인정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매력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다는 점이다. 일단 한 인물에게만 무게감이 쏠린 나머지 매력적인 버디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목적의식, 사건에 뛰어드는 동기의 층위가 불균형하기 때문이다. 한직인 국정원 파견 검사에서 벗어나 본청으로 복귀하겠다는 목적을 지닌 한지훈의 각오에 비해, 첩보 임무와 개인적인 복수를 함께 실행에 옮기려는 지강인의 목적은 한에 사무쳐 있다. 이처럼 감정선의 차원이 다르다 보니, 필연적으로 균형추는 지강인에게 쏠리고 만다.
또 한지훈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도구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다 보니 마지막 반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지 않다. 그가 거듭 명목적으로 옳은 길을 추구하는 이유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으며, 그는 사건을 주도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사건에 휩싸이는 인물이다. 그래서 한지훈은 지강인의 카운터 파트너로 활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캐릭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그간 <슬기로운 감빵생활>, <오징어 게임> 등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인물로 분했을 때 박해수라는 배우가 빛났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측면이다. 그 결과 러닝타임 내내 지강인의 존재감은 확실하지만, 다른 캐릭터와의 합에서 느껴져야 할 영화적인 시너지는 찾기 어렵다. 양동근, 이엘, 송재림, 박진영이 연기한 블랙 팀의 존재감도 미미한 나머지 <야차>는 마치 설경구의 솔로 무비 같다.
첩보 액션 영화로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과감한 카레이싱과 대만 로케이션은 인상적이지만, 그 이후에는 눈을 사로잡을 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연이은 총격전과 육박전은 비슷한 시퀀스들의 연속과 반복에 불과하다. 중국 공안과의 총격전처럼 사실적이기보다는 다소 과장된 모습의 액션 연출은 액션의 밀도나 강렬함을 역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익숙하고 안전한 클리셰들의 반복은 고조되던 긴장감을 되려 약화시킨다. 김씨 일가의 자산관리 담당자 혹은 그 담당자의 자녀가 망명을 요청한 것이나, 두더지라고 불리는 정보기관 내 이중첩자의 존재, 남북한의 화합을 가로막는 제3 국의 방해 공작 등은 꼭 첩보 영화가 아니더라도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 같은 작품에서 이미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설정이다.
심지어 <야차>는 조악한 화법 때문에 한 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야차>는 두 주인공을 내세워 정의를 이루는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하는 작품이며, 그 정당성을 둘러싼 이견은 이야기 전개의 주된 동력이 된다. 반면에 두 주인공, 곧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정의와 첩보 영화의 측면에서 보면 국가가 국제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작중 남북의 화합과 협력은 이익이고, 이를 방해하려는 일본의 공작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며, 이는 마땅히 수용되어야 할 전제로 여겨진다. 일본의 공작을 전범 기업 및 국내 재벌 기업과 관련지으면서 손쉽게 '악'으로 단순화하는 마무리가 대표적이다.
이는 정치적 방향성이나 호불호와는 별개로 영화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한 구도와 손쉬운 전개, 감정에 호소하는 접근법을 통해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인상이 남기 때문이다. 선악의 구분 없이 국익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정세를 다각도로 포착하려던 시선이 돋보였던 <강철비>, 동포로서의 동질감이나 일체감에 기대는 감정적 호소 대신 남과 북의 특수한 외교적 관계를 스토리텔링의 동력으로 삼았던 <모가디슈>와 비교해보면 <야차>의 아쉬움은 더욱 크다.
결과적으로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끌며 순항 중인 <야차>는 버디무비의 묘미도, 액션 영화의 짜릿함도, 첩보 영화의 긴장감도 보여주지 못한다. 첩보 영화이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깊은 사회적 통찰도 그 한계만 보여줄 뿐 이렇다 할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본래 극장 개봉을 계획했으나 끝내 넷플릭스로 향한 <야차>의 선택은 상업적 측면에서 볼 때 최선의 선택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