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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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숱한 대형 항공사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실력파 파일럿 '한정우'(조정석). 그는 유명 TV 예능에 게스트로 출연하고 각종 강연에 초청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서 범한 한순간의 잘못 때문에 한정우는 해고당해 빚더미에 나앉고, 설상가상으로 아내와도 이혼한다.
항공사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도 불가능한 상황. 이에 한정우는 여동생 '한정미'(한선화)를 돌파구로 삼는다. 뷰티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정미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하고, 한정미 신분으로 각종 서류를 위조해 파일럿으로 취업한 것. 하지만 그는 이내 또 한 번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동료 '윤슬기'(이주명)와는 친분을, 선배 '서현석'(신승호)과는 악연을 쌓는 사이 여장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위기에 빠진다.
면죄부를 놓친 코미디
코미디라는 장르는 면죄부를 하나 갖는다. 웃기면 그만이라는 것. 장르의 목적 자체가 기존 상식을 의도적으로 뒤틀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기 때문. 그래서 코미디 영화는 개연성이 중요하지 않다. 복선을 회수하지 못해도, 스토리텔링이 매끄럽지 않아도 충분히 웃기면 호평받는다. 2019년 <극한직업>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한 <핸섬가이즈>까지 웃음에만 집중한 코미디 영화가 사랑받은 트레드가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면죄부는 한순간 독이 든 성배로 바뀌기도 한다. 웃음이 나오지 않으면 유머 뒤에 숨은 단점들이 한순간 튀어나오기 때문. 관객들이 선웃음 후감동이라는 한국 코미디 영화 공식을 갈수록 외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도 공식을 답습한 <드림>으로는 100만 관객을 간신히 돌파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의 김한결 감독이 스웨덴 영화 <Cockpit>(2012)를 리메이크한 <파일럿>은 면죄부를 받기 어렵다. 이유는 명확하다. 코미디와 스토리가 따로 놀면서 웃겨야 할 부분이 안 웃기다. 특히 젠더 이슈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는 깊이가 너무 얕은 나머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2024년 여름을 책임질 롯데 엔터테인먼트의 텐트폴 영화라기에는 실망스러운 지점이 많다.
웃기긴 하다
물론 <파일럿>이 전혀 안 웃기드면 거짓말이다. 여장한 한정우가 남자라는 사실을 들킬 뻔한 중반부는 더러 큰 웃음을 자아낸다. 엄마의 칠순잔치 전후로 한정우와 한정미 남매가 보여주는 티키타카가 대표적이다. 한정우가 서현석 면전에서 욕을 뱉거나, 클럽에서 진짜 여성인 줄 알고 집적대는 남자들을 제압하는 장면도 돋보인다. 코믹 연기와 트랜스젠더 연기 경험이 많은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극대화된 결과물이다.
나름 근래 트렌드를 반영한 초반부의 빌드업도 꽤 안정적이다. 여장을 선택한 이유와 과정을 요즘 속도감으로 빠르게 밀어붙여서 몰입감을 높였다. 개연성이 부족하려는 순간에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코미디로 승부한다. 여동생으로 위장한 한정우가 면접장에서 궤변과 패기로 기어코 합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마다 장르적으로 먼저 선수를 치는 듯하다.
빠른 전개로 인한 빈틈도 열심히 채우려고 한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같은 예능이나 다른 유튜브 크리에이터,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과장되거나 어색한 지점이 있어도 초중반부에는 적당히 수긍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일례로 한정우의 여장은 그다지 정교하지 않지만, 이 역시 코미디를 표방하는 시도로서 암묵적으로 용인되기에는 충분하다.
블랙 코미디로의 확장
이에 더해 한국 사회의 젠더 이슈를 다방면으로 비판하며 블랙 코미디 영역도 항로에 포함시킨다. 우선 <파일럿>은 여성의 관점에서 직장 내 성차별을 다룬다. '노정욱'(현봉식) 상무나 서현석 기장 등의 외모 품평이나 성희롱은 근무 중에도 프로페셔널한 영역을 벗어난 상황을 맞닥뜨리는 여성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정미가 된 한정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여성으로서 크고 작은 수모를 피하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본질을 잃은 여성 우월주의나 페미니즘 마케팅도 풍자의 대상이다. 극 중 흑막으로 등장한 '노문영'(서재희) 이사는 회사 내 여성 파일럿 비중을 무조건 50%로 끌어올리는 역차별적 여성 할당제를 밀어붙인다. 또 직장 내 성희롱을 폭로한 제보자를 보호하는 대신 회사 이익을 위해 방패막이로 던져 버린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타인의 인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방향성을 알 수 없는 풍자
하지만 <파일럿>은 블랙 코미디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추락하기 시작한다. 예민한 사회 이슈를 모호한 태도로 건드린 대가라고 볼 수도 있다. 한정우는 회식 자리에서 노정욱 상무의 성희롱적 발언을 적당히 무마하려다가 실언을 한다. '다들 본업에서 고생하는데도 이 정도 외모면 예쁜 편'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 것. 회식에 참석했던 윤슬기가 이 발언을 녹음해 폭로하자 한정우는 노 상무와 함께 가해자로 몰려 해고된다.
문제는 한정우의 문제 발언에 대한 영화의 태도가 오락가락한다는 것. 일각에서는 그를 두둔하고 윤슬기의 행위를 비난하는 듯 보인다.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은 성차별로 보기 어렵다거나 그가 감내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과하다는 식의 언급이 반복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윤슬기의 행동을 두둔한다. 한정우는 해당 발언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윤슬기라는 캐릭터는 끝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즉, <파일럿>은 젠더 이슈에 대한 평가나 해석을 관객에게 떠맡기고 관망한다. 여장이라는 소재 특성상 젠더 이슈를 안 다룰 수는 없으니, 논란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셈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역효과를 낸다. 블랙 코미디답지 않게 조심스러워하니 웃음 대신 도리어 이슈만 부각된다.
다른 블랙 코미디와 비교하면 <파일럿>의 실수는 더 명확하다. 일례로 애덤 맥케이 감독의 <바이스>나 <돈 룩 업>은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한 쪽 입장을 정한 뒤에 예민한 주제를 다뤘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영화의 관점에 동의하든 안 하든 코미디임을 인지한 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웃음을 만들지 못한 <파일럿>의 '모두 까기'는 한국 사회 이슈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풍자보다는 비겁한 회피 기동에 가까워 보인다.
도박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더라면
더 나아가 젠더 이슈를 다루는 방식 또한 아쉽다. '여자는 꽃이 아니다' 혹은 '왜 외모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처럼 일차원적이고 교조적인 대사나 연출 때문에 흐름이 자주 깨진다. 분명 웃긴 한정우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단발적으로 불타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이유다. 코미디와 풍자가 조화되지 않다 보니 역지사지로 여성들의 어려움에 공감한다는 한정우의 대사에도 힘이 실릴 수가 없다.
캐릭터 구축도 어설프다. 주인공 한정우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을만한 캐릭터가 없다. 예를 들어 서현석은 운항 때마다 여성 파일럿에게 성적인 농담을 하고 집적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아마 구시대적인 남성들의 인식을 과장해 꼬집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적 요소가 유머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서현석이라는 인물은 부자연스럽고, 과하며, 불필요하다는 인상만 남긴다.
윤슬기 역시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양성평등 교육자료에서 볼법한 교과서적인 대사를 주로 내뱉는다. 그 결과 분명 한정우와 함께 각본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한정우의 원맨쇼를 받아주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결말에서 두 인물의 갈등이 해결되거나 관계가 정리되지도 않았기에 문제가 더 크다.
차라리 윤슬기와 한정우의 악연에 주목하면 어땠을까 싶다. 여성이 된 한정우는 윤슬기와 친구가 되면서 자기 말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윤슬기는 한정우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이해하는 식으로. 그 과정에서 여성이 마주한 현실적 난관도, 그 여성을 악용하는 이들도 같은 선상에 두고 비판했다면 <파일럿>의 모두 까기는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건 조정석뿐
그나마 주인공 한정우의 서사는 안정적이다. 자기 커리어에만 몰두하던 한 사람이 역경 속에서 역지사지를 깨닫는 이야기이라서 보편적인 감성을 지녔다. 파일럿이라는 꿈에만 열중한 채 자기 아내가 수술했는지, 엄마가 칠순인지, 아들이 발레리노를 꿈꾸는 지조차 모르던 한정우. 그는 실직과 이혼, 여장 생활을 거치면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법을 배워나간다.
하지만 한정우의 이야기만 기억에 남는 것은 코미디 영화로서 만족할만한 귀결이 아니다. 코미디 영화가 장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을 기존의 감동 코드로 감춘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웃음으로 승부를 보는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 트렌드와는 다소 동떨어진 전개다. 또 젠더 이슈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결말을 보다 보면 그의 이야기가 진정으로 해피엔딩인지 의문이기도 하다.
결국 <파일럿>은 여름 영화에 걸맞은 수준으로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지도 못하고,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풍자하지도 못했다. 대다수 관객이 공감할 법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주지도 못했다. 결국 조정석의 원맨(?)쇼만 남은 셈이다. 좋은 개봉시기를 선점한 텐트폴 영화치고 <파일럿>을 향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