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깊은 숲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전영하'(김윤석).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소원이 담긴 펜션을 소중히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께름칙한 손님 한 팀이 나타난다. 어린 남자아이와 함께 펜션을 예약한 '유성아'(고민시). 그녀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영하를 불편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영하는 유성아가 새벽 일찍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관심을 보이던 LP판에는 혈흔을 묻혀 놓고, 화장실은 락스로 깨끗하게 청소했으며, 수장 두 건을 없앤 채로. 직감적으로 유성아가 데려 온 아이를 살해했음을 눈치챈 영하. 하지만 그는 남은 증거를 불태우고 모른 척하기로 결심한다. 혹시나 소문이 나면 펜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1년 뒤, 유성아가 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보상받지 못한 호불호
작품성과 대중성. 영화, 드라마 제작진이 언제나 고민할 딜레마다. 다른 예술도 다르지 않지만, 특히 영상 매체는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기에 항상 대중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중성이 언제나 옳은 길인 것도 아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선택이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원하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OTT의 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OTT가 불러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는 작가와 제작자의 두려움이 줄었다는 것. 크리에이터의 비전에 크게 개입하지 않으니 이전까지는 관객 수나 시청률, 대중의 호불호를 우려해 제작하지 않던 작품이 빛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대중성과 괴리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OTT의 파급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적지 않다.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험적인 스릴러다. 관련 없어 보이는 과거와 현재를 느린 호흡으로 교차하다가 마지막에야 모든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서스펜스보다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고, 대중적으로 익숙한 작법이 아니니 호불호도 필연적이다. 하지만 호불호를 불사한 선택이 역으로 드라마 전체의 만듦새를 무너뜨린 나머지 실험은 무위에 그쳤다.
돌 맞은 개구리 이야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연히 범죄자와 마주쳐 피해자가 된 이들의 사연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범죄자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비춘다. 과거 모텔 사업을 하던 '구상준'(윤계상)은 연쇄살인범 '지향철'(홍기준)을 만난 후 가정이 무너진다. 현재 펜션을 운영하는 영하도 사이코패스 살인자 유성아를 고객으로 만난 뒤 일상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더해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또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살인자뿐만 아니라 기자나 경찰, 자극적인 이슈에 몰입한 이들 또한 돌을 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극 중 기자와 경찰 모두 그럴듯한 대의나 정의감 대신 특종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상준과 영하를 이용하니까. 신문사 기자는 지향철 관련 특종을 잡으려 상준과 인터뷰하려 하고, '윤보민'(하윤경/이정은)도 연쇄살인범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에 상준을 이용한다.
이 상황에서 개구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있다. 상준처럼 과거에 갇힌 채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상준의 아들인 '기호'(박찬열)처럼 자기 방식으로 과거와 맞서 싸워 트라우마를 이겨낼 것인지. 이 지점에서 무관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는 접점이 생긴다. 아직 유성아와의 악연이 끝나지 않은 영하는 상준이 될 수도 있고, 기호가 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가 어떤 결정을 할지 쫓는 심리극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역할의 부작용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느낌이 다르다. 중반부까지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돼야 비로소 그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 그들의 접점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전체적인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릴러를 기대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악수를 뒀다. 각 캐릭터에게 역할을 잘못 부여하면서 이질감을 극대화한다. 사실 상준과 영하의 시점으로 나뉜 이야기를 접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다. 윤보민이 그 접착제다. 과거 신참 형사로서 상준 사건에 참여했고, 지금은 새로 부임한 소장으로서 영하 사건에 개입하는 윤보민. 드라마는 그녀를 매개로 접점이 없는 두 아버지의 이야기를 엮어내려 한다.
그런데 정작 윤보민은 철저한 관찰자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두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두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옆에서 조망할 뿐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 자신의 이야기도 과거와 현재 두 시점에서 따로 펼쳐진다. 그 결과 윤보민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드라마는 오히려 구심점을 잃어버린다. 두 이야기를 엮기 위해 만든 인물 때문에 오히려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반부로 갈수록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가지가 너무 많아진다. 각 플롯이 각자 할 말만 한다. 영하와 유성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고 하면 상준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성인이 된 기호가 등장하면서 상준의 플롯은 더 복잡해지고, 기호와 영하의 접점을 묘사하는 동안에는 유성아가 잠시 잊히는 느낌마저 든다. 차라리 철저히 윤보민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면 난잡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진한 캐릭터 활용
이에 더해 반전을 주려고 전개를 꼬는 중에 메시지와 스토리의 모순도 노출하고 만다. 그 중심에는 유성아가 있다. 사실 시청자 입장에서 그녀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동기가 뭔지, 그녀가 왜 아이를 살해했는지, 왜 영하의 펜션에 집착하는지. 그녀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러다 보니 영하가 돌 맞은 개구리가 되는 과정에도 몰입하기 쉽다. 영하만큼이나 시청자도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사족을 덧대 매력을 스스로 가린다. 재벌가 출신 사이코패스라는 개인사가 드러는 순간, 유성아는 개성을 잃는다. 그녀는 이제 익숙한 한국형 악역이다. 그러니 그녀에 대한 신비감이나 공포감도 일순간 사라지고, 그녀가 원우먼쇼로 지탱해 온 서스펜스도 단숨에 사라진다. 그녀가 그린 그림, 펜션 인테리어, 고민시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자아낸 답답한 분위기마저 불친절한 과시로 보이기 십상이다.
결국 드라마의 주제마저 모호해진다. 사고와도 같은 범죄자와의 만남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핵심 소재다. 그런데 유성아의 가족사는 그 사고를 통속적인 가족극으로 뒤바꿔 버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딸, 유성아가 아버지 영하의 사랑을 받은 딸, '의선'(노윤서)을 노리는 꼴이다. 즉,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는 상준과 영하의 접점 대신 유성아와 영하의 딸의 차이만 부각되면서 평범한 범죄 드라마로 귀결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범죄자나 형사의 시점이 아니라 피해자 관점에서 진행되는 스릴러라는 특징이 확실했다. 범죄 사건 피해자의 고통보다 사건의 자극성에만 열광하는 세태를 지적하는 의도도 시의적절했다. 그저 일관된 방향성을 잡지 못한 나머지 주요 플롯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을 따름이다.
결국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애매한 스릴러, 평범한 넷플릭스 작품 중 하나로 남는다.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메시지가 뇌리에 꽂히지도 않는다. 전달 방식이 독특하지도 않다. 그나마 고민시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지 않을까.
* 구독, 라이킷, 댓글, 응원하기는 큰 힘이 됩니다. 긴 리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