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oDAY Nov 13. 2024

사흘 | 부성애로 쌓았지만 오컬트는 버티지 못한 공포

<사흘>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구마의식 도중 딸 '소미'(이레)를 잃은 흉부외과의사 ‘승도’(박신양). 장례식장에서 그는 직접 집도한 딸의 심장 이식 수술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지, 딸이 왜 수술 직후 귀신에 씐 것처럼 이상해졌는지를 되짚는다. 그러던 중 승도는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듣고,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보고, 딸의 시체가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보며 소미가 아직 살아있다는 편집증에 빠져든다. 


한편, 구마의식을 거행했던 신부 '해신'(이민기)도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거듭 복기한다. 분명 악마를 퇴치했는데, 소미가 돌연 사망했기 때문. 그 과정에서 해신은 이름마저 잊혔던 악마가 소미에게 깃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늦게나마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소미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승도는 악마를 막기 위해 소미의 시체를 태워야 한다는 해신의 말을 무시하고, 그러는 사이 악마는 소미의 심장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한국형 오컬트의 새 지평 

한국형 오컬트물은 <검은 사제들> 이후로 새 전기를 맞이했다. <사바하>, <사자>, <8일의 밤>, <클로젯>, <변신>, <곡성> 등 수많은 오컬트 작품들이 제작됐고, 올해에는 <파묘>가 오컬트 영화 중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심지어 <핸섬가이즈>처럼 오컬트와 코미디를 결합한 작품도 170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오컬트물의 저변은 넓어졌다. 


물론 대중의 선택을 받은 오컬트 영화는 여전히 일부이며,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바로 오컬트라는 장르를 한국화 했다는 것. <검은 사제들>은 한국을 배경으로 가톨릭 엑소시즘 장르에 충실했고, <곡성>은 한국 특유의 무속 문화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냈으며, <파묘>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속설을 풍수지리 오컬트로 풀어내면서 공감을 이끌어냈다. 


현문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사흘>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 특유의 시공간적 배경과 가톨릭 엑소시즘과의 접점을 만들었다. 부성애라는 콘셉트를 살려 구마 사제가 아닌 주인공을 중심으로 기존 오컬트물과의 차별점도 부각했다. 그러나 <사흘>은 위 세 작품과 같은 반열에 서지 못한다. 장르적 측면에서 과욕을 낸 나머지 아이디어를 지탱할 기반과 결말로 향하는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검은 사제들>과는 다르다

<사흘>을 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당연 <검은 사제들>이다. 가톨릭 신부의 구마 의식이 핵심 소재로 등장하고, 구마 의식을 소녀에게 행하는 만큼 유사성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사흘>과 <검은 사제들>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크다. 가톨릭 엑소시즘을 한국화 하는 방식이 정반대이기 때문. <검은 사제들>은 악마와의 대결과 구마 사제의 희생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흐름을 따르되, 단지 한국으로 배경으로 삼은 영화였다.


반면에 <사흘>은 한국적인 정서 그 자체에 주목한다. 한국적인 문화와 가톨릭 교리 간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눈에 띈다. 제목으로 사용된 '사흘'이라는 소재가 대표적이다. '사흘'은 한국 특유의 3일장과 기독교에서 예수가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 걸린 기간 모두를 뜻한다. 이처럼 상이한 문화권에서 생사의 경계가 모호한 순간을 접합시킨 덕분에 <사흘>은 이전 작품과는 다른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3일장이라는 문화를 시공간적으로 구조화한 각본도 인상적이다. <사흘>은 1일 차 운명, 2일 차 입관, 3일 차 발인 세 챕터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덕분에 사흘이라는 시간 제약 속에 악마가 부활하는 과정과 이를 막으려는 사투 간의 긴장감은 극대화될 수 있다. 공간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장례식장으로 배경을 한정하면서 오컬트물다운 서늘함을 극대화했다.


 

부성애의 양면성

<사흘>의 주인공과 메시지 역시 일반적인 퇴마 영화와는 다르다. 구마 사제 해신은 철저히 조력자, 보조자 역할로 등장하기 때문. 대신 그 자리는 퇴마 대상인 소미의 아버지, 승도가 차지한다. 시작과 끝만 보더라도 그 의도는 분명하다. 오프닝 시퀀스는 실패한 구마 의식을 보여주는데, 이때 카메라는 해신이 아니라 승도의 시점을 따라간다. 영화의 결말 역시 승도와 소미의 부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성애에 초점을 맞춘 스토리는 예상을 벗어나는 공포감을 선사하기에 더욱 섬뜩하다. 사실 겉보기에 <사흘>에서 공포의 대상은 소미여야 한다. 악마에 씐 그녀가 온갖 악행이나 기묘한 사건을 일으킬 거라고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예상하는 장면은 충분히 등장한다. 소미가 친구를 죽이려 들거나, 그녀의 시체 안에서 검은 심장이 뛰거나, 시체가 자의적으로 냉장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을 고조하는 역할은 소미가 아니라 승도에게 넘어간다. 처음에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딸을 향한 사랑이 강조된다. 하지만 슬픔이 깊어질수록 부성애가 극단적으로 발현되고, 악마가 승도에게 씌운 듯한 연출이 등장하며 서스펜스가 극대화된다혼자만 딸의 음성을 듣고, 딸의 시체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편집증적인 묘사는 박신양의 연기력 덕분에 더욱 안타까우면서도 기괴하다. 


부성애를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은 장르적 목적과도 부합한다. 기독교 기반의 오컬트물에서는 결국 사람의 믿음이 가장 큰 무기로 등장하곤 한다. <사흘>도 다르지 않다. 소미에게 깃든 악마를 무찌르는 힘이 단순히 구마 사제의 기도가 아니라, 올바른 형태의 사랑, 곧 딸에 대한 믿음이라는 암시가 드러나기 때문. 애초에 모든 사건의 원인이 딸을 살리려는 잘못된 부성애였다는 점도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다. 

 


양면성을 오가는 한 끗

승도가 '한 끗 차이'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편집증적인 아버지를 오가는 묘사는 <사흘>을 관통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해신의 서사만 봐도 그렇다. 그는 과거 자신을 악마로부터 구해주고 목숨을 잃은 선배 신부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구마 사제직을 수행한다. 그런데 악마를 무찌르겠다는 열의가 선을 넘는 순간, 그는 역으로 악마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한다. 


극 중 오컬트적인 장치에서도 '한 끗 차이'의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소미에게 깃든 악마는 '이그마엘'로 밝혀진다. 그는 나자렛의 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악마로, 형과 함께 온 마을 사람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다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에 의해 붙잡혀 이름도 잊히고, 검은 심장 안에 봉인당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심장을 가진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날 때, 그도 부활한다는 전승도 남겼다. 


이그마엘과 관련된 묘사와 전승은 사실 익숙하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까지의 여정을 고스란히 따른다. 그저 주인공이 예수가 아닌 악마일 뿐이다. 이는 결국 일종의 비유처럼 보인다. 전승의 주인공만 바꿔도 부활까지의 사흘이 기쁨과 환희가 아닌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듯이, 그 어떤 사랑도 중용의 미덕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하는 셈이다. 



욕심 한 끗을 버렸더라면

안타깝게도 한 끗의 중요성은 <사흘>의 만듦새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퇴마라는 장르적 쾌감이 기대 이하다. 구마 의식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부각하다 보니 흐름과 분위기가 예상과 다를 수 있다. 클라이맥스인 후반부 보일러실 장면도 <검은 사제들>처럼 숨 막히고 온몸이 조여들어가는 듯한 구마 장면은 아니다. 그저 라틴어 기도문을 읊는 수준에 불과하다 보니 전문적인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무엇보다도 색다른 오컬트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한 끗 과했던 나머지, 전체 그림이 뒤틀리고 말았다. <사흘>은 이그마엘과 러시아 정교회 간의 연결고리를 등장시키면서 한국 오컬트 영화에서 흔하지 않았던 그림을 보여준다. 아이디어 자체는 흥미롭다. 불교, 무속, 가톨릭, 일본과 태국 귀신까지는 다뤘어도 정교회 관련 소재가 한국 영화에서 등장한 적은 거의 없으니까. 


문제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러시아 마피아 클럽에서 펼쳐진 이그마엘 소환 의식도 같이 보여준다. 그런데 그 의식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속 재현 영상처럼 조잡하다 보니 앞서 쌓아 올린 서스펜스가 일거에 깨지고 만다. <파묘> 속 굿 장면이 매번 긴장감을 강화한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인 셈이다. 


결국 이 장면을 기점으로 <사흘>은 결말까지 극을 세련되게 끌고 갈 동력을 잃어버린다. 이 한 끗을 살렸더라면 수능 즈음에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한 <검은 사제들>과 유사한 포지션을 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Acceptable 무난함

욕심 한 숟갈을 끝내 덜어내지 못한, 부성애 오컬트


* 구독, 라이킷, 댓글, 응원하기는 큰 힘이 됩니다. 긴 리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놈 3 | SSU에 '로건' 향을 첨가한 라스트 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