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만 바뀌고 반복된 디지털 성폭력, 언론은 무엇을했나

by 박하

사회는 진보합니다. 디지털성범죄를 엄벌하는 ‘n번방 방지법’이 4월 29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사이버 공간 성범죄를 처벌해달라는 ‘국회 국민청원’에 10만 명이 동의하고, n번방 참여자 전원의 신상공개와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등 수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항의한 결과입니다. 이번에 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성 착취 영상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한 자를 3년 이하 징역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강요한 경우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아동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은 아동청소년 대상 불법 성적 촬영물 배포 시 신상정보 등록 대상에 포함했으며, 형법 개정안은 성폭력 범죄 모의 시 예비·음모죄로 처벌하는 내용을 신설했습니다. 디지털 성폭력과 맞서 싸워온 이들은 커다란 진전을 이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더디게’ 진전했습니다. 1997년 디지털 성폭력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빨간마후라 사건’부터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다크웹, 그리고 N번방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공간 내 성폭력은 무대만 바뀐 채 반복됐습니다. 각종 디지털 성범죄 사태마다 여성들은 분노하며 싸워왔으나 변화는 ‘나중에’로 미뤄졌습니다. 성폭력, 그것도 디지털 공간에서 일어난 성폭력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다뤄지지 않다가 이렇게 뒤늦게 처리됐습니다.

여성들이 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갈 때 언론은 무엇을 했을까요.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을 파헤치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야 할 언론은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요. 그간 디지털성범죄의 계보를 짚으며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불법 촬영물 유포의 시초격 ‘소라넷’…폐지에만 17년 걸려

1999년에 시작돼 2016년 4월에 폐쇄된 ‘소라넷’은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고 성범죄를 모의한 불법 인터넷 사이트입니다.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소라넷’ 회원들은 길거리·화장실·샤워실 등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어 유포‧소비하거나, 연인 간 합의로 또는 몰래 찍은 성관계 영상을 ‘국산 야동’이라며 제작‧소비했습니다. 모텔에서 술 취한 여성의 사진을 찍어 올려 윤간을 유도하는 성범죄도 자행됐습니다.


불법 촬영물 온라인 유통의 시초격인 ‘소라넷’ 폐쇄에 앞장선 건 여성들이었습니다. 2015년 여성차별·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맞선 ‘메갈리아’는 소라넷의 불법 성적 촬영물 유포와 성범죄 모의를 폭로하며 ‘소라넷 폐쇄’ 운동을 벌였고, ‘디지털성범죄아웃(DSO)’의 전신인 ‘소라넷 아웃 프로젝트’는 소라넷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불법행위를 수사당국에 고발했습니다. 온라인 행동 네트워크 ‘아바즈’에 같은 해 9월 게재된 ‘불법 성인사이트 소라넷을 폐쇄해주세요’ 서명운동엔 9만여 명이 동참했고, 11월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 청원을 언급하며 강신명 경찰청장에 소라넷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12월 26일 SBS는 〈그것이알고 싶다〉 ‘새벽의 위험한 초대’에서 소라넷의 실상을 파헤쳐 사회적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해외에 서버가 있어서 수사가 어렵다’던 경찰은 소라넷 폐지 운동이 거세지자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고, 소라넷은 운영된 지 17년만인 2016년 4월 폐쇄됐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조차 없던 언론…소라넷을 ‘음란 사이트’로 치부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인 소라넷이 여성들의 분노와 항의로 어렵사리 폐쇄되는 동안 언론은 ‘소라넷’을 그다지 중요한 의제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2015년 1월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모니터 대상 16개 매체의 ‘소라넷’ 키워드가 들어간 네이버 기사는 382건에 불과합니다.


당시 언론은 ‘디저털 성폭력’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소라넷을 ‘음란 사이트’로 치부하기 일쑤였습니다. 동아일보 <국내 최대 음란 사이트 ‘소라넷’ 해외 핵심 서버 폐쇄>(2016/4/7) 한겨레 <몰카에서 성폭행 모의까지…음란사이트 소라넷 폐쇄 추진>(2015/11/26) 연합뉴스 <‘아동 음란물 제작‧배포’ 소라넷 회원 불법행위도 수사>(2016/4/11) MBN <“음란사이트 소탕”…소라넷 카페 운영자 등 검거>(2015/12/31) 등 대부분의 언론 매체가 소라넷을 ‘음란 사이트’로 표현했습니다. 명백한 성폭력인 디지털 성범죄를 ‘야한 동영상’쯤으로 축소한 것입니다. 소라넷이 불법 성착취 촬영물을 유포하고 강간 모의까지 한 점을 보면, 이런 기사들은 언론의 낮은 성인지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당시에도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말라’는 여성단체의 지적이 있었으나, 여전히 가해자의 개인신상정보에 집중한 보도가 나왔습니다. 조선일보 <음란물 포털 ‘소라넷’ 창립자는 서울대 출신>(16/6/14) 동아일보 <소라넷 창립자는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 부부>(2016/6/14 김호경 기자) YTN <음란 포털 소라넷 창립자 정체 “서울대 출신 부부”>(2016/6/13)에서 소라넷 핵심 운영자가 ‘서울대 출신 부부’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반면, 소라넷에 가입한 100만 명의 가해자들을 조명한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불법 촬영물을 돌려본 수많은 회원은 ‘가해자’로 호명하지 않았습니다. 수사당국도 소라넷의 불법 촬영물 시청자들을 적극적으로 색출하지 않았습니다.


‘소라넷’ 가해자에 감정이입…2차가해 보도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 감정이입하며 2차 가해를 한 기사도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소라넷은 어떻게 17년을 살아남았나>(2016/4/8 삭제)에서 소라넷 폐쇄를 앞두고 가해자인 가상의 운영자 시점에서 쓴 기사를 보도했는데, 다음은 해당 기사의 일부 내용입니다.


‘식구’끼리니까 하소연 좀 해도 되지? 요즘 내가 참 힘들다. 알 사람들은 다 알거야. 최근 우리 사이트(소라넷)가 폐쇄된 거. ……(중략) 리벤지 포르노, 강간 모의, 집단 성행위. 이 단어를 느꼈을 때 움찔했는가 아니면 친근함이 느껴졌나.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고객임이 분명하다. 소라넷 운영자 A다. 아 부끄러워마라.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중략) 관음증, 일탈, 폭력 등 익명성 뒤에서 우리 회원들은 쌓아둔 것을 마음껏 발산하지 (중략) 이번 사태로 정말 소라넷이 절멸될지도 몰라. 그러나 언젠가 당신들의 은밀한 욕망이 우릴 불러낼걸? 믿기 힘들다고? ……(중략) 내가 왜 이렇게 집착하느냐.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들 중 많은 사람이 바로 나의 사용자들이자 고객들이기 때문이지….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연합뉴스는 소라넷에서 벌어진 디지털 성폭력의 심각성을 은폐하고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면서 소라넷 100만 이용자에게 “부끄러워마라. 당신은 이상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해당 기사는 논란 직후 삭제됐으나, 당시 언론인의 성인지 수준을 적나라게 보여준 기사입니다

.

동아일보는 <지금 SNS에서는/소라넷 폐쇄, 음란물 비상구는?(2016/4/22 김호경)에서 소라넷 폐쇄를 두고 위와 비슷한 기사를 썼습니다. 다음은 일부 내용입니다


설마 했습니다. 지난해 11월 강신명 경찰청장이 국회에서 “소라넷 사이트의 폐쇄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느낀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중략) (소라넷은) 국내 인터넷 음란물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음란물계의 ‘네이버’와 같은 곳이죠 (중략) 아무런 공지도 없이 사이트가 열리지 않자 소라넷 회원들은 당황했습니다. 경찰의 서버 압수를 알지 못했던 일부 회원들은 트위터를 통해 운영진을 겨냥해 ‘회원들이 우습게 보이냐’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경찰이 서버를 압수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에는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죠 (중략) P.S. 요즘 카카오톡으로 음란 사진이나 영상을 주고받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보는 것은 괜찮아도 다른 곳에 퍼나르면 불법입니다.


이 기사는 소라넷의 불법 성적 촬영물을 ‘음란물’로 가볍게 소비하며 또 다른 음란물 공유사이트가 나올 것이라고 암시했습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쓴 기사이며 명백한 2차 가해입니다. 기자의 성인지 수준은 소라넷 회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론의 수준이 이러하니 수사당국도 소라넷 회원들을 처벌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 후예들은 동아일보 기자의 말대로 ‘비상구’를 찾았습니다. 바로 ‘웹하드’입니다.


② 처벌받지 않은 소라넷 후예들이 ‘웹하드 카르텔’ 키워

폐쇄된 소라넷의 뒤를 이어 불법 촬영물의 유통 공간으로 ‘웹하드’가 부상했습니다. 인터넷상에서 파일과 영상을 공유하는 웹하드에선 소라넷과 비슷하게 화장실·탈의실·길거리 등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일반인을 도촬한 사진과 성관계를 몰래 찍은 촬영물들이 유포됐습니다. 피해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유작’이라는 이름을 붙었습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소라넷과 다르게 국내에 서버를 두고 합법적으로 운영 중인 ‘웹하드’에서 버젓이 범죄 촬영물이 유통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는 웹하드와, 불법 촬영물을 필터링하고 삭제해주는 업체의 실소유주가 같은 이른바 ‘웹하드 카르텔’이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생산, 유통, 삭제가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던 것입니다. 이 ‘웹하드 카르텔’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건 여성들이었습니다. 2017년부터 웹하드 카르텔을 추적해온 한국사이버성폭력센터(한사성) 2018년 2월 경찰에 ‘웹하드 카르텔’을 고발한 뒤 공론화에 나섰습니다.


이어 2018년 7월 28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웹하드 불법 동영상의 진실’이 웹하드 카르텔의 중심에 있는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을 고발하면서 여론에 불을 붙였습니다. 당시 방송에 따르면, 양 씨는 불법 촬영물을 올리는 사람들을 ‘헤비 업로더’라고 부르며 이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양 씨는 불법촬영물을 삭제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와 불법 촬영물을 필터링하는 업체의 경영권에 관여했습니다. 영상을 올리는 사람도 올라온 영상을 삭제하겠다는 사람도 같았던 것입니다. 이런 불법 촬영물을 돈을 주고 산 수 만명의 남성들에 의해 양 씨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양 씨가 실소유한 웹하드 1위 업체인의 2017년 한해 매출은 210억원, 영업이익률 25%를 기록했습니다. SBS 보도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성범죄 산업에 대해 특별 수사를 요구한다>(2018/7/29)라는 청원이 올라와 20만 여명이 참여했고, 경찰청장이 ‘웹하드 카르텔’을 엄정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양진호의 ‘엽기 행각’에 주목한 언론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웹하드 카르텔’의 핵심인 양 씨에게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양 씨 개인의 엽기적인 행동이 폭로된 이후에 주목했습니다. 2018년 10월 30일 ‘셜록’과 ‘뉴스타파’가 양 씨가 자신의 직원의 뺨을 때리거나 생닭을 칼로 베라고 지시했다는 등의 일탈 행위를 폭로하자 관련 보도가 쏟아진 것입니다. 조선일보 <이번엔 ‘닭 잡는 워크숍’…양진호에 경찰 수사팀 42명 투입>(2018/11/1) 서울경제 <양궁으로 닭쏴라 폭행 논란 양진호 워크숍셔 엽기행각>(2018/11/1) YTN <“사람을 물건처럼”...양진호 회장, 소시오패스 가능성?>(2018/11/1) KBS <물컵 던지고 성추행까지…양진호 ‘갑질’ 일삼아>(2018/12/5) 등에서 양 씨의 엽기 행동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습니다. 집단적인 디지털 성범죄보단 개인의 일탈 행위에 주목했습니다.


실제로 SBS <그것이 알고싶다> 보도 이후 ‘양진호’씨의 실명이 거론됐으나, 2018년 1월 1일부터 2018년 10월 29일까지 모니터 대상 매체에서 ‘양진호’ 실명이 언급된 네이버 기사는 단 1건도 없습니다. 같은 기간 ‘웹하드 카르텔’로 검색된 기사는 34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뉴스타파와 셜록의 폭로 이후인 2018년 10월 30일부터 2018년 12월 31일까지 ‘양진호’씨가 검색된 기사는 2,500여건에 이릅니다. 언론이 어떤 이슈에 반응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여성단체들은 본질은 웹하드 카르텔이라며 언론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다시함께상담센터 등은 2018년 11월 6일 서울 프레스센테어세 기자회견을 열어 “양진호 개인의 도덕성 문제만을 증폭하고 웹하드 카르텔에 대한 내용은 축소하면서 필터링 기술조치에 대한 불법행위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며 언론의 보도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신지예 당시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위원장은 이날 회견에서 “양진호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핵심은 웹하드 카르텔이고, 거대한 웹하드 카르텔에 비하면 양진호(의 갑질)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습니다.


③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성착취 영상물을 공유한, ‘웰컴 투 비디오’ 사건

2018년 3월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 성착취물 공유 사이트 ‘웰 컴투 비디오’를 운영한 한국인 손정우 씨가 검찰에 검거됐습니다. ‘웰 컴투 비디오’는 특정한 프로그램으로만 접속 가능한 ‘다크웹’ 기반 사이트로, 이곳에서 비밀스럽게 아동 성착취 영상물이 유통됐습니다. 120만 여명의 이용자와 4천여명의 유료 회원이 아동 성적 학대 영상 25만개를 돌려봤습니다. 사건을 수사한 미국 연방 검사 제시 리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형태의 아동 성착취 영상 사이트”였다며 수사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아동성착취물 영상을 구매해 본 영국인은 22년형, 미국인은 15년형 등 무거운 처벌을 받았으나, 정작 이 사이트를 운영한 한국인 손 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그쳤습니다. 또, 2018년 3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국내 이용자 235명을 검거했으나 이들중 일부는 ‘무죄’를 받기도 했습니다.


전대미문의 ‘웰컴 투 비디오’ 사건에 언론은 무관심

그러나 ‘웰 컴투 비디오’ 사건이 불거졌던 2018년 당시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2018년 1월부터 2018년 12월 31일까지 모니터 대상 매체의 네이버 기사에서 ‘웰 컴투 비디오’ ‘다크웹’이 언급된 기사는 10여건에 불과했습니다. 다크웹에서 음란물 사이트를 운영한 한국인이 붙잡혔다는 스트레이트 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최근 ‘n번방 사건’ 이슈가 터지고, 운영자인 손 씨의 출소가 임박하자 언론의 관심이 높아졌으나, 사건 당시에는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④ 불법촬영 영상물 편파 수사를 규탄한 ‘혜화역 시위’

여성들은 ‘불법 촬영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정부와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그 분노가 시위로 터져 나왔습니다. 인터넷 다음 카페에 개설된 ‘불편한 용기’가 2018년 5월19일 서울 혜화역 인근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를 연 것입니다. 이 시위는 A대학 회화과 누드 크로키 수업에 투입된 남성 누드모델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에 올라온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경찰은 수사 개시 직후 불법 촬영물을 유포한 안 모(여자)씨를 12일 만에 구속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소라넷’이 폐지되는데 17년이 걸렸고, 평소 남초 커뮤니티에 불법 도촬·촬영물이 수시로 올라오지만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응한 것에 비춰봤을 때 이례적인 적극 수사는 ‘편파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이들은 여성들 대상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도 강력히 수사해줄 것을 촉구하며 “(불법촬영물) 생산자, 유포자, 소비자뿐 아니라 숙박업소, 숙박어플로 연결된 웹하드의 유착관계를 철저히 조사하고 수사하여 처벌하라” “우리는 공중화장실에서, 탈의실, 지하철, 길거리, 집에서조차 불법촬영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다. 여성의 모든 것을 성적 도구로 소비하는 한국 남성들의 미개한 행태에 분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시위는 같은 해 12월 22일을 마지막으로 총 6차례 열렸습니다.


‘과격발언 논란’에만 집중한 언론

여성들은 ‘불법 촬영물’ 근절을 외쳤으나, 언론은 일부 과격 발언에 집중했습니다. 시위 참가자가 여성 정책에 소극적인 정부를 비판하며 ‘문재인 재기해’를 구호로 외쳤는데, 언론은 이 ‘재기해’라는 단어에 주목한 것입니다. ‘재기해’는 2013년 남성연대 대표로 여성혐오 논란을 빚은 고 성재기씨가 마포대교에서 투신한 것을 조롱하는 은어입니다. 결국, 혜화역 시위는 ‘대통령 비하’ ‘남혐 논란’ ‘고인 모독’ 논란 등으로 번졌습니다.

중앙일보 <시위 장소 옮긴 ‘혜화역 지보히’…워마드 관련설, 영향 미칠까?>(2018/8/3) <“문재인 재기해!” 구호 외친 혜화역 시위…일부 참석자들 “너무 나갔다”>(2018/7/7) 등에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이라는 본질에 벗어난 일부 과격 발언에 집중했습니다.


이같은 언론보도가 디지털 성범죄에 극심한 피해를 느끼는 여성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소모적 논쟁만 키운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당시 ‘불편한 용기’는 <언론의 왜곡된 보도에 따른 불편한 용기 운영진의 입장문>(2018/7/11) 입장문을 내어 “언론사들은 ‘불편한 용기’측의 의견을 각 언론사의 입맛대로 재단하고 왜곡하며, 이를 날조하여 보도하고 있다”며 “옆에서 죽어가는 자매들을 바라보며 무력감을 느껴온 여성들은 이제야 겨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목소리마저 입막음하려는 언론의 억압에 통탄한다”고 밝혔습니다.

⑤ ‘n번방 사건’ 최초 폭로한 ‘추적단 불꽃’…취재 나선 언론은 ‘한겨레’ 뿐

‘디지털 성폭력’은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웰컴 투 비디오를 거쳐 ‘n번방 사건’으로 진화했습니다. 이 사건도 정부나 언론이 아니라 기자를 지망하는 여성 대학생들에 의해 처음으로 폭로됐습니다. ‘추척단 불꽃’이 2020년 7월 뉴스통신진흥회 주최 ‘제1화 탐사르포 취재물 공모’에 르포기사 <미성년자 음란물 파나요? 텔레그램 불법 활개>를 발표했습니다. 2020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n번방 사건’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입니다. 지금은 ‘초유의 사건’으로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당시 이 사안에 관심 가진 언론은 ‘한겨레’뿐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추적단 불꽃’과 공조해 2019년 11월 <텔레그렘에 퍼지는 성착취> 시리즈를 연재했습니다. 이어 2020년 1월 17일 SBS <궁금한 이야기Y>, 2020년 2월 20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20년 3월 국민일보가 <n번방 추적기>를 연재하면서 ‘n번방 사건’이 공론화에 뒤늦게 나섰습니다.

언론은 ‘n번방 사건’을 보도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번 ‘n번방 사건’은 이전에 없던 초유의 디지털 성범죄가 아닙니다. 앞서 디지털 성폭력의 계보를 짚어봤듯, ‘소라넷’부터 ‘n번방’까지 수법만 바뀐 채 진화해왔습니다. 소라넷은 100만 명의 회원이 있었고, ‘n번방 사건’은 최대 26만으로 추산되는 공범자가 있습니다. 이들을 강력히 처벌하는 것은 사건 해결의 첫 출발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사회‧문화적 측면을 되짚고 점검해야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