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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Jun 12. 2019

20년 만에 다시 읽은 김대중 자서전

세기의 동지였던 김대중과 이희호, 두 분을 추모하며

김대중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 수록된 사진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사랑하는 젊은이와 존경하는 국민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는 내 학창 시절에 접한 몇 안 되는 나침반 같은 책이었다. 초판이 1993년에 나오고 김대중 대통령이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8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니 정말 오래된 책이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수많은 책들을 정리하면서도 이 책만큼은 절대 버리지 않았던 것은 존경하는 지도자이자 현명한 시대의 큰 어른이 들려주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과 철학, 굳은 신념이 주는 교훈이 시간이 지나도 유효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희호 여사님의 부고를 접하고 근 2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밤새 정독했다. 책 도입부에 실린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의 사진들을 보자 울컥,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밑바닥부터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자택연금 날짜를 달력에 표기하는 두 분의 사진이다. 

기자들 앞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외려 밝은 표정의 김대중 대통령이 인상적이다. 

'동교동 감옥'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자택연금을 당했던 김대중 대통령.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이유야 말해 무엇하리. 이희호 여사님 덕분이었음을 모르는 국민은 이제 없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영어를 배워라' '10년쯤 한 우물을 파라' 같은 젊은이에게 보내는 충고와 영국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의 에피소드 같은 게 더 인상 깊게 다가왔었는데 이제 어른이 되고 결혼한 입장에서 다시 읽어보니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 두 분이 겪어온 수많은 가시밭길 인생과 부부로서 함께 살아온 이야기가 더 가슴을 파고든다. 


결혼 열흘 만에 감옥에 끌려들어 간 정치가 남편을 지켜본 새색시는 숱한 죽음의 고비와 독재, 군사정권 하의 박해 속에서도 인동초처럼 질기고 질긴 동지의식과 사랑으로 남편을 지켜냈다

 아내와 남편은 가장 가깝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공동운명체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어렵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나에게는 여러 차례 목숨을 건 결단을 해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80년 신군부 사람들에게 붙들려 갔을 때, 내가 그들의 회유와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나의 아내였습니다. 

 만일 내가 변절한다면 가장 실망하여 나에 대한 존경심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사람이 나의 아내일 것이란 사실을 나 자신에게 환기시켰습니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내와 가족들에게 부끄러운 남편이자 부끄러운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5.17 사건으로 사형 언도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군부는 자기네들과 손잡으면 살려주겠다고 유혹을 계속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여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만 내가 믿는 하느님과 국민과 역사가 더 두려웠습니다. 마침내 내가 아니라 국민과 역사의 심판이 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결혼하면서 나와 남편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다른 사람이 나나 남편을 보고 '아, 저 사람 배우자는 누굴까?'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더 좋은 사람이 되자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는 약속이었다. 감히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에 비견할 수 있을까마는 부부 사이에 배우자에게 한점 부끄럽지 않게 살고, 나아가 존경까지 받을 수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아내를 생각하며 초개와 같은 신념을 지켜내셨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평생 동안 이뤄낸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절반의 몫은 이희호 여사의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박마리아 여사가 옥중에 있는 안중근 의사에게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만의 죽음이 아니라며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 편지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나는 중앙정보부, 육군 교도소 그리고 청주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죄명은 광주폭동 선동, 반국가단체의 수괴로서 처음에는 사형, 그다음에는 무기, 또 그 후에는 2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형 집행정지로 나왔습니다. 나의 감옥생활은 특별히 가혹했습니다.... (중략) 아내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중에 헤아려 본 바에 의하면 아내의 편지는 모두 합쳐 640 통이었고, 아들들은 총 200통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한 달에 봉함엽서 한 장밖에는 편지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약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횡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편지지를 더 달라고 몇 번이고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글씨를 축소하는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언론은 내 글씨가 쌀알의 절반만 하다고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나는 봉함엽서 한 장에 무려 1만 4천 자를 채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통의 원고지 한 칸의 공간에 22자를 새겨 넣은 셈이었으니, 그것은 이미 확대경 없이는 판독할 수 없는 '깨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 한 통을 쓰려면 이틀에 걸쳐 12~13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2년 동안 640통이나 되는 편지를 매일 같이 써내려가며, 또 손바닥만 한 작은 엽서 한 장에 담긴 남편의 빼곡한 옥중서신을 읽어 내려간 여사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혹한 시대의 운명에 시달리셨으나 그것을 뛰어넘는 두 분의 헌신적인 사랑과 서로에 대한 존경, 그것은 말 그대로 '동지' 그 자체였다. 국어사전에서 '동지'의 의미를 찾아보니 同志 -목적이나 뜻이 같음 또는 그런 사람-으로 나온다. 나는 이제 겨우 결혼 12년 차에 접어들 뿐이지만 부부 사이에 뜻이 같고 가치관과 신념이 같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아갈수록 느낀다. 우리네 평범한 서민들이야 부부간 동지의식이란 겨우 경제관념이나 자녀교육관 정도나 같을 뿐이지만 두 분의 동지의식은 반독재와 민주주의, 남북통일, 세계 평화와 같은 원대하고도 고차원적인 것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세상 어느 부부보다도 더 굳건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든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분을 보며 나는 남편에게 이마만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됐다. 이제 비로소 천국에서 하나가 되신 김대중 이희호 여사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두 분의 유지대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선량한 민주시민으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해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안락함과 행복을 저버리고 평생 가시밭길을 걸어오신 두 분,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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