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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중학교 정원 이야기 14

털부처꽃 월동 준비

by 이주형

나무와중학교 정원 이야기 14

- 털부처꽃 월동 준비-


자연의 시간에는 없고, 인간의 시간에만 있는 형용사가 있다면 아마 "바쁘다" 일 것이다. '바쁘다'와 '쫓기다'는 그 의미가 매우 가깝다. 바쁘게 사는 것에는 쫓기며 산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집합 관계가 '쫓기며 산다'가 훨씬 더 크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아무리 부지런히 해도 늘 바쁜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렇다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도 세상에 달라지는 건 많지 않은데, 왜 늘 쫓기며 살까?


학교 정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바쁨은 나를 정원과 분리시켰다. 아니 일에 쫓겨 살다 보니 스스로 정원을 잊었다. 생각은 항상 정원에 있었으나, 몸은 언제나 컴퓨터에 묶여 있었다.


숨이 거의 넘어갈 때서야 나는 컴퓨터를 박차고 나왔다. 몸이 정원으로 가는 길을 기억했다. 발의 속도는 무서웠다. 시간이 만든 습관은 고개를 돌리게 했다. 활짝 열린 교장실 문으로 가을 햇살이 진격을 시작했다. 그 문을 꼭꼭 닫고 산 것은 일에 쫓긴 나였다.


한 달 동안 발길을 못한 11월 말 학교 정원에는 가을이 가득했다. 느티나무는 잎마다 가을 이야기를 적어 세상으로 보내고 있었다. 길마다 느티나무 엽서로 넘쳤다. 길 한쪽에 우체통처럼 설치해 둔 낙엽 전용 자루의 배가 홀쭉했다. 바람이 벗어놓은 아쉬움이 빈 자루 안에서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타의 배부른 선물 자루를 기억하는 느티나무가 내 발자국 소리에 가지마다 가을바람을 들였다. 나뭇잎이 만국기처럼 펄럭이며 쏟아졌다. 비질 몇 번에 자루의 배가 금방 빵빵해졌다.


만추가 든 느티나무 숲길에 서면 늘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정결함!".


학생들은 말한다.


"교장 선생님, 어차피 또 떨어질 건데 왜 매일 힘드시게 낙엽을 쓰세요!"


어떻게 들으면 의문문 같지만, 자세히 들으면 안타까움의 감탄문과 그만하라는 명령문이다. 매일 새롭고, 정결한 가을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학생들의 말을 응원이라 생각하고 매일 낙엽을 쓸었다.


한 달 동안 방치해 둔 느티나무 숲길의 낙엽을 치우고, 멸종 위기 식물 보전 학교 정원으로 갔다.

정원 초입에 있는 미선나무가 가을의 소임을 다했다고 자랑하듯 몸을 흔들었다. 산수국, 자주꿩의다리, 속단 등이 차례로 가을 보고회를 열었다. 보고회의 절정은 결실까지 마친 섬시호였다. 섬시호는 모두가 누렇게 변해가는 정원에 푸른 신호등을 켜고 나를 맞이했다. 멸종 위기 2급 식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른 생명력으로 2025년과 2026년을 잇는 섬시호는 분명 학생을 닮았다.


섬시호를 지나 맞이한 식물은 식물원에서 가장 키가 큰 털부처꽃! 지난여름과 가을, 키를 한껏 키우고 풍성한 보라색 꽃으로 학생들은 응원하던 털부처꽃이었다. 11월 말에 본 털부처꽃은 철을 잊고 사는 나를 질책하듯 회초리 같은 긴 몸을 연신 흔들었다. 꽃이 있던 자리엔 내년을 위한 씨방이 가지런히 집 짓기를 이미 마쳐 있었다.


사람이 철을 잃어가는 반면, 자연은 아무리 인간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철에 맞추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음을 월동 준비를 마친 털부처꽃을 보고 다시금 확인했다. 이제 2025년도 한 달 채 남지 않았다. 남은 기간 동안만이라도 "바쁘다"는 핑계 대신 정원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날라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서 고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 음악소리는 정원 잊듯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무와중학교 학생 밴드가 연주는 음악이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학생들이 곧 자연이라는 진실을. 정원 식물들을 지킨 것은 학생들이라는 것을.


나무와중학교 학교 정원에는 두 개의 거대한 자연이 서로를 위해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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