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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전화기 너머 목소리


 1.
 '유능한 현실주의자가 가끔 곤경을 맞이하는 이유는 상대도 자신처럼 합리적으로 판단하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란 문구를 읽은 적 있다. 현실주의자는 맹목적 신념이나 겉으로만 그럴듯한 명분을 위해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기에 당연히 상대도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예상하는데 정작 상대는 광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문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래서 반항심 가득하고 자의식 강한 중학생 특유의 감성에는 대단히 멋진 표현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의문이 생겼다. 

 현실주의자는 기본적으로 편협하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특히 '유능한 현실주의자'라면 더욱 그런 면이 도드라질텐데 '내가 합리적으로 판단하니 상대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이다'는 자신에 비추어 상대를 예상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다. 정말 유능한 현실주의자라면 상대가 종교적 광신자, 도덕적 근본주의자, 무모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자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까? 

 어쨌거나 나의 입장 혹은 내가 지닌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일상에서 흔하고 응급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쉴새없이 걸려오는 '응급실 문의 전화'를 응대하면 정말 그렇다. 

 시술이나 수술이 필요한 중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119 구급대와 인근 병원 응급실에서 걸려오는 전원문의가 아닌 일반적인 진료 문의에 대한 답변은 응급실 주요 업무가 아니다. 물론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도움을 얻기 위해 응급실에 전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꼭 흉통, 호흡곤란, 편마비(hemiplegia), 어둔한 발음(dysarthria), 의식 저하 같은 심각한 증상이 아니더라도 고열, 심한 구토, 옆구리 통증, 지속적인 설사 같은 증상이 갑작스레 나타나면 환자와 보호자는 당황할 수 밖에 없고 특히 그런 상황을 자주 겪지 않았다면 깜짝 놀라 응급실에 전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전화기 너머 환자 혹은 보호자를 진정시키고 응급실을 방문하라고 권유하며 환자 스스로 보행이 어렵다면 119 구급대를 이용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응급실 의료진이 해야할 일이다. 

 다만 종종 아주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자친구가 어디가 아픈지 말해주지 않는데 많이 아픈 것 같아요', '3년 전부터 허리가 아팠고 지금 많이 아프지는 않은데 문득 생각나서 전화했소.', '장염으로 인근 의원에서 치료받아 증상이 많이 좋아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헤야할까요?', '무릎 관절 수술하면 비용이 얼마요?', '여자친구가 저한테 욕해서 정신과 진단서 발부받고 싶은데 어떻게 헤야 하나요?', '비타민 요법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응급실에서는 비용이 얼마에요?', '석고로 만든 깁스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깁스의 가격 차이가 얼마요?", '여자친구가 전화해서 말없이 우는데 어디가 아픈 것일까요?', '우리 바깥 양반이 알콜중독자인데 술 끊는 주사를 응급실에서 줄 수 없소?' 대부분은 응급실에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고 몇몇은 아예 의사가 아니라 점쟁이 혹은 예언자의 신통력이 필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의사가 아니라 점쟁이에게 물어봐야할 질문입니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 최대한 완곡하게 '응급실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업무를 하지 않습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대답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이 계속 전화해 비슷한 질문을 던질 때가 종종 있다. 

 며칠 전 걸려온 전화도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열흘 동안 아팠으면 병원에 가야겠죠?"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정중했다. 술취한 음성도 아니고 무엇이든 꼬투리 하나 잡으려는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응급실에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에는 분명했다. 

 "그 정보만으로는 뭐라 답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환자가 누군가요? 혹시 전화한 분이 환자입니까?"

 내 물음에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신도 전해 들었고 정확한 증상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열흘이나 지속되었다면 응급실을 방문해서 진료해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증상에 따라 응급실에서 완벽한 진단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응급실을 방문해서 혹시 응급 수술이나 입원이 필요한 심각한 질환이 아닌지 감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30분 후 걸려온 전화에서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진료비가 얼마인가요?"

 이번에도 '응급실에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의료보험 있는 환자보다 진료비가 많이 나올 것은 틀림없으나 무슨 검사를 시행하고 어떤 약을 투여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료비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재차 '열흘 동안 증상이 지속되었으니 응급실을 방문해서 심각한 질환을 감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론적인 답변과 함께 통화를 마쳤다. 

 그런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또 전화기 너머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배가 아프다는데 무슨 질환인가요?' 역시나 '응급실에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그런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로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고 설령 자세한 정보가 있어도 직접 환자를 진료해야 임상적으로 질환을 추정하고 치료 계획을 세울 수 있음을 설명했다. 덧붙여 더 이상 전화 통화는 의미없으니 환자와 함께 응급실을 방문하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역시 전화기 너머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가 외국인이어도 진료가 가능한지, 지금 가면 어떤 검사와 시술이 가능한지 물었다. 솔직히 짜증났고 화가 치밀었으나 나는 이번에도 정중하게 '응급실로 직접 환자와 내원하여야 판단할 수 있는 사안'임을 설명하고 전화를 마쳤다. 

 그리고 2시간 후 드디어 환자가 내원했다. 

 2.
 젊은 환자는 혈압, 맥박, 체온, 호흡수 같은 활력 징후는 정상 범위였다. 의식 상태가 명료했고 호흡곤란도 없었으며 영양 상태도 양호했다. 덧붙여 특별한 외상도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환자는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영어도 극히 기초적인 수준이라 나의 일본어 실력-나는 일본어로 술과 음식만 주문할 수 있다-과 비슷했다. 우리 병원 직원 가운데 환자의 모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전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기초적인 영어 단어와 손짓발짓으로 대화할 수 밖에 없어 이학적 검사(physical exam)가 아주 중요했다. 

 이학적 검사 결과 우상복부 통증(RUQ pain)이 명확했다. 우상복부 통증이 있을 뿐 아니라 숨을 깊이 들이쉬면 악화되는 양상이 확인되었는데 이른바 머피 징후(Murphy's sign)로 급성 담낭염(acute cholecystitis, 쓸개의 염증으로 수술이 필요하다)일 가능성이 높은 이상이었다. 덧붙여 배꼽 아랫 부분을 눌렀을 때도 경미한 통증을 호소했다. 다행히 우하복부 통증(RLQ pain)은 관찰되지 않아 급성 충수염(acute appendicitis) 가능성은 낮았으나 급성 담낭염 역시 응급 수술이 필요한 질환에 해당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젊은 나이였고 건강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으나 최근 병원에서 진료한 적이 없고 열흘 전부터 통증이 있었으니 일반적으로는 진통제를 투여하고 혈액 검사를 확인한 다음 복부 CT를 시행할 사례였다. 복부 CT는 조영제를 사용해야 정확히 병변을 관찰할 수 있는데 신장 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영제가 금기라 혈액검사에서 크레아티닌(creatinie) 수치를 확인하고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또 30분에서 1시간 정도 복부 CT가 늦어져도 환자에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환자는 의료보험 없는 외국인으로 의학적 문제는 아니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료보험이 없으니 복부 CT만으로 진료비가 50만원에 육박했다. 혈액검사까지 시행한다면 비용은 60만원을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복부 CT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신장 질환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낮고 복부 CT 결과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할 경우 혈액검사를 처방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복부 CT 결과는 흥미로웠다. 머피 징후를 동반한 우상복부 통증이 있었으나 담낭(쓸개)은 정상 크기이며 주변의 염증도 없고 결석도 확인되지 않았다. 복부 대동맥을 비롯한 혈관에도 이상이 없고 충수(appendix)도 정상 크기였다. 소장과 대장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다만 간을 싸고 있는 단단한 피막(hepatic causule)에 경미한 염증이 있고 자궁(uterus)과 난소(ovary) 주변에서는 좀더 심한 염증이 관찰되었다. 꽤 오랜만에 나는 피츠-휴-커티스 증후군(Fitz-Hugh-Curtis syndrome)이란 병명을 떠올렸다. 

 피츠-휴-커티스 증후군은 복잡한 이름과 '증후군'이란 어감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심각한 질환이 아니고 치료도 어렵지 않다. 쉽게 말해 골반염(PID, pelvic inflammatory disease)인데 하복부 통증 같은 전형적 증상 대신 우상복부 통증이나 숨쉴 때 악화하는 오른쪽 아래 가슴 통증 같은 비전형적 증상이 나타나는 사례다. 우상복부 통증이 나타나나는 이유는 골반(pelvic cavity) 내에 국한되었던 염증이 간을 싸고 있는 단단한 피막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다만 피막 아래 간의 실질 조직에 염증이 퍼지는 것은 아니어서 심각한 문제는 아니며 대부분은 항생제로 치료된다. 때때로 입원 치료가 필요하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환자의 경우 고열이 동반하지 않았고 복부 CT에서 확인된 골반염도 아주 심하지 않아 입원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통제와 정맥 항생제를 투여했고 역시 항생제와 진통제로 구성된 경구약을 1주일 분량 처방했다. 지금 당장 입원 치료가 필요하지 않으나 1주일 후 꼭 산부인과 외래를 방문해야 한다는 설명을 '전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몇 번이나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
 피츠-휴-커티스 증후군을 처음 마주한 것은 레지던트 2년차 무렵이었다. 그때도 환자는 급성 담낭염에 꼭 들어맞는 증상과 혈액검사 결과를 보였다. 고열, 우상복부 통증(RLQ pain), 아주 명확한 머피 징후(Murphy's sign)를 보이는 젊은 여자 환자였고 혈액검사 결과에서는 백혈구 수치와 C반응 단백질(CRP, C-reactive protein, 감염이 있으면 증가한다) 수치가 증가했고 빌리루빈 수치와 간효소(hepatic enzyme) 수치도 소량 증가했다. 그러나 복부 CT 결과 담낭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골반염이 심했고 조영제를 투여한 화면에서 간을 둘러싼 피막(capsule)이 유별나게 밝게 보였다. 난감했다. 담낭염이 아니니 일반외과 레지던트는 자기네 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소화기내과 레지던트도 마찬가지였다. 산부인과 레지던트는 골반염은 있으나 골반염으로는 우상복부 통증, 간효소 수치 증가를 설명할 수 없어 역시 환자를 입원시킬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지하 1층에 자리잡은 영상의학과 판독실을 찾아 공손히 '빠른 판독'을 부탁한 끝에 피츠-휴-커티스 증후군이란 얘기를 들었고 pubmed에서 논문을 검색한 후에야 무슨 질환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몇 시간 후 나는 산부인과 레지던트에게 '피츠-휴-커티스 증후군을 산부인과에서 입원시키지 않으면 어디에서 하냐?'고 거들먹거리고 '역시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옛 말이 틀린 것이 없네'라고 쏘아 붙였다. pubmed에서 찾은 해당 논문을 출력한 종이 뭉치를 던지듯 건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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