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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Nov 25. 2024

검정색 테이프가 말하지 못한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1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모니터 불빛만이 방을 희미하게 밝혔다.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임시로 저장해 둔 파일이 가득했다. '자서전_1.docx', '자서전_2.docx'... '자서전_11.docx' 휴지통에서 삭제된 "내 인생의 전환점은..." "나의 첫 번째 기억은..." "어린 시절의 상처는…." 파일들을 복원해 봤다. 누구에게 들킬까 봐 무서운 날 것의 흔적이었다.


왼쪽 모니터에는 ChatGPT 창이 떠 있었고, 오른쪽 모니터에는 워드 프로그램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워드 새문서에는 '나만의 자서전 쓰기 : 생애 첫 기억'이라는 제목이 입력되어 있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을 글로 쓰고 싶어. 그 희미한 순간을 어떻게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같이 브레인스토밍해 보자."


챗GPT에게 질문했다.


"그 첫 기억의 순간으로 천천히 돌아가 보세요. 그때 보았던 색채는 어땠나요? 들었던 소리, 맡았던 냄새는 기억나시나요? 그 순간 함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고,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왜 하필 그 순간이 첫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까요?"


챗GPT가 답변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이상하게 목이 마르고 속이 메스꺼웠다. 몸이 자꾸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다. 화장실을 괜히 갔다 왔다. 침대로 돌아가 이불속에 눕고 싶었다. 내일은 컨디션이 좋을지도 몰라. 자고 일어날까? 완벽하게 준비하려면 일주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다음 달이면 더 용기가 생길지도 몰라. 자꾸 미루고 싶었다.


문득 책꽂이에 꽂힌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3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나의 인생은 도망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왕따를 피해 도망쳤고, 직장에서는 부당한 대우를 피해 도망쳤다. 사랑이 깊어질 때면 상처받기 전에 도망쳤고,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을 때면 실패하기 전에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그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도망치고 있을 순 없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같은 상처를 안고 사는 누군가에게,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누군가에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내 생애 첫 기억은 4살 때의 일이다.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가장 또렷이 남은 세 장면이 있다."


그때, 갑자기 모니터가 깜빡였다. 화면이 거울처럼 변하더니, 그 안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네 살 배기였다. 까맣고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현기증이 났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키보드가 녹아내리고, 책상이 흐려졌다. 방 안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달력이 하루씩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2024, 2023, 2022…. 숫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1981이라는 숫자에서 멈췄을 때, 나는 이미 그해 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

엄마와 옆집 아주머니가 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네 살 배기인 내가 지켜보고 있다.


“막내가 젖을 뗄 때도 됐죠. 일 년 반이면 많이 먹인 거예요."

"우리 산들이는 젖을 떼고 나서 얼마나 울었다고요."


아주머니의 손에 시커먼 테이프 한 롤이 쥐어져 있었다. 검색 전기 전열 테이프였다. 아주머니가 까맣고 끈적한 테이프를 잘라서 엄마 젖꼭지에 붙였다.


"그래도 산들이는 순했잖아요. 이 녀석은 끈질겨."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이 네 살배기 계집애를 비췄다. 알 수 없는 감정에서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동생도 이제 더는 엄마의 품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안도감, 곧이어 밀려오는 죄책감. 어쩌면 그도 저렇게 거부당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처음 느낀 듯하다.


"산들아, 이리 와봐."


엄마가 불렀다. 네 살배기 계집애가 엄마 곁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동생은 엄마 품에 안겨 있다. 엄마는 네 살배기 계집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동생 울면 달래줘야 해."

|

그래, 나는 늘 양보해야 했다. 오빠한테는 대들면 안 되고, 동생한테는 양보해야 했다. 첫째는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니까, 막내는 귀여우니까. 그렇다면 둘째인 나는? 그저 비어 있는 중간. 채워지지 않는 공백.


"엄마…." 입을 벙긋 열었다 멈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도 사랑해 줘'? '나도 안아줘'?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철이 너무 일찍 들어버린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부터였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 검정색 테이프가 붙여졌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는 테이프. 그 끈적한 검정색이 내 목소리를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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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네 살 배기가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어깨를 떨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방 안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낡은 망토를 걸친 노인이었다. 한 손에는 낮게 기울어진 등불을 들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불편하지." 노인이 말했다. 목소리는 동굴 속처럼 깊고 메아리쳤다. "네 방으로 돌아가렴. 그곳이 제일 편할 테니."


노인은 망토 자락을 끌며 아이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등불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원을 그렸다.


"혼자가 좋지? 아무도 너에게 뭐라 하지 않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방 안에 있으면 네 맘대로 할 수 있어. 거절당할 일도, 버려질 일도 없지."


노인의 말에 아이가 고개가 끄덕인다. 그러자 그가 등불을 내밀었다. 흔들리는 불빛 속의 내 모습이 비쳤다. 네 살의 나, 열네 살의 나, 스물네 살의 나, 마흔네 살의 나. 우리는 모두 같은 눈빛이었다. 늘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빛.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노인이 속삭였다. 


"기대하지 마라. 요구하지 마라.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마라. 그러면 네 마음에 붙인 검정색 테이프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테니."


/

노인의 등불이 꺼지자, 세상이 어두워졌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네 살 배기인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밤하늘에서 떨어진 은빛 깃털이었다. 깃털은 방바닥에 닿자마자 작은 별이 되어 반짝였다.


"크리스티나, 슬퍼하지 마라."


천둥소리 같은 종소리가 울렸다. 수정처럼 맑은 울림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공유를 닮은 천사가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시간이 담겨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하느님이 너와 함께하신다."


천사가 내 이마에 손을 얹자, 중력이 사라졌다. 몸이 빛으로 변해 창문을 뚫고 올라갔다. 도시의 불빛이 아래로 멀어졌다. 네온사인은 반딧불이가 되었다가, 이내 은하수 속으로 녹아들었다.


까만 우주를 가르는 동안 별들이 속삭였다.


"네 이야기를 들려줘."

"우리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유성이 지나가며 하늘에 금빛 궤적을 그렸다. 그 빛을 따라가니 작은 행성이 보였다. 황금빛 모래로 뒤덮인 B612였다. 착륙한 순간, 발아래 모래가 반짝였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거울처럼.


모래 위에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서 있었다. 목에 두른 노란색 목도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어린 왕자였다. 그의 발치에는 한 송이 장미가 피어있었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린 꽃잎은 새벽이슬을 머금어 촉촉했지만, 입술은 검정색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다.


"이리 와봐."


어린 왕자는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작은 태양이 뜨는 것 같았다. 따스했다. 우리는 함께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땅에서 장미가 피어났다가 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꽃은 분홍빛으로 피어나 보랏빛으로 지고, 또 어떤 꽃은 새하얀 채로 피었다가 진홍빛으로 졌다.


"이게 무슨 장미들이야?"

"네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야. 피어나려다 지워버린 마음들."


언덕을 넘자 끝없는 장미정원이 펼쳐졌다. 달빛 아래 수천 송이의 장미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든 장미의 입술에는 검정색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달빛은 테이프 위에서 차갑게 번쩍였다.


그때였다. 정원 저편에서 한 송이 장미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붙인 채로 흥얼거렸다. 곧이어 다른 장미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테이프 때문에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곡조에는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저 노래를 아니?" 어린 왕자가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

"그래, 네 심장이 부르는 노래야."


어린 왕자가 첫 번째 장미 앞에 멈춰 섰다. 이 장미는 유독 작고 여렸다. 꽃잎은 아직 채 피지 못한 봉오리 모양이었다. 달빛이 스치자, 장미가 파르르 떨었다. 마치 네 살 배기처럼.


"이제 테이프를 떼어볼까?"


어린 왕자의 말에 장미가 고개를 저었다. 꽃잎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서워…."테이프 틈새로 새어 나온 작은 목소리였다.

"무서운 걸 알아. 하지만 넌 이미 충분히 용감했어."


어린 왕자가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정원에 젖내가 가득했다. 따뜻한 살냄새, 엄마의 품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 향기. 장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말하고 싶었어…. 엄마, 나도 사랑해 줘. 나도 안아줘. 나도…." 드디어 테이프에서 자유로워진 입술로, 장미가 속삭였다.

두 번째 장미는 보랏빛이었다. 테이프 아래로 상처 입은 꽃잎이 보였다.

"난 달라지고 싶었어. 도망치는 대신 맞서고 싶었어."

세 번째 장미는 시간이 멈춘 듯 반쯤 피어있었다.

"사랑이 두려웠어. 버림받기 전에 먼저 떠나버렸지."


장미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달빛은 색을 바꾸었다. 순수한 즐거움으로 프로그램을 짜던 고교 시절의 코발트빛, 처음 글쓰기를 배우며 설렘으로 가득했던 붉은빛, 봄날의 교정을 걸으며 사랑에 설레었던 핑크빛, 세상을 프레임에 담던 사진학도 시절의 수정 같은 스트로보빛. 모든 순간이 빛이 되어 정원을 물들였다.


달빛이 깊어질수록 장미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테이프는 이슬이 되어 꽃잎을 타고 흘러내렸다. 떨어진 테이프는 땅에 닿자마자 작은 씨앗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씨앗에서 새로운 장미가 피어났다. 이번에는 테이프 없이, 자유롭게 피어난 장미들.


"봐,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태어나는 거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상처도, 아픔도, 도망쳤던 순간들도 모두 네 이야기의 씨앗이야."


정원은 이제 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장미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노인의 등불과는 다른 빛이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하늘로 피어오르는 빛.


맨 마지막 장미 앞에 섰을 때, 어린 왕자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낡은 만년필이었다.

"이제 네 차례야."

"무슨 말이야?"

"네가 써내려 가야 할 이야기. 더 이상 도망치지 마."


만년필을 든 순간, 몸이 다시 빛으로 변했다. 귀환의 시간이었다. 별들 사이를 지나 지구로 돌아오는 동안 장미들의 노래가 들렸다. 이번에는 가사가 선명했다.


우리는 모두 피어날 거야

테이프 없이, 자유롭게

네가 쓰는 대로

우리는 이야기가 될 거야


/

눈을 떴을 때, 노트북 모니터의 커서가 제자리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B612에 다녀온 걸까, 아니면 꿈을 꾼 걸까.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날짜와 시계를 봤다. 2024년 11월 25일 03시. 문자 앱에 알림이 떠 있었다. 한 시간 전, 부처 언니가 남긴 메시지였다.


"몸이 아프다고 하더니, 늦게까지 글 쓰는 거니? 억지로 쓰지 마. 네 글이 필요한 사람은, 네가 준비됐을 때 찾아올 거야."


책상 위에 걸린 글쓰기 수료증을 봤다.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하고 수료증을 내미니 “소설 쓰자!”라고 적어 주신 글쓰기 스승님의 필체.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Backspace 키를 다다다다 누르고 제목을 다시 입력했다.

"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 검정색 테이프가 말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마지막 문장까지 힘 있게 써 내려갔다.


"내 생애 첫 기억은 검정색 테이프와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테이프는 말문을 막으려 한 게 아니라, 때가 되면 꽃처럼 피어날 이야기를 지키고 있었다는 걸."


마침표를 찍고 머리칼을 넘기는 데 손끝에서 장미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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