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로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2주
살면서 겪었던, 절대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일들 중 특기할만한 것은 단연 선거운동이다. 우리 가족은 2002년부터 2014년까지 총 네 번의 선거운동을 치렀다. 3번의 지방선거와 1번의 총선, 이렇게 12년 동안 치른 4번의 선거운동은 우리 가족과 나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선거운동의 일원으로 혹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기 위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빠의 당선을 목표로 한 일이기에 더욱이 그렇다.
아빠는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2년에 처음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하셨다. 00시의 시장 직에 도전을 하신 것이다. 시민들의 각 가정에 배포될 브로슈어에는 우리 가족의 단란하고 오붓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실어야 한다는 선거사무실 실무진분들의 의견에 따라 나는 피아노를 쳤고, 오빠와 부모님은 뒤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맞잡은 채 즐거워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그리고 00시 3개 구에 위치한 3군데의 선거 사무실을 하교 후 또는 주말에 방문하거나, 아빠가 유세를 하는 장소에 가서 아빠에게 힘을 보태는 등의 간접적인 선거운동을 했다. 만 20세 이상이 되어야만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선거법에 의거해 소박하지만 아빠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선거운동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 18세, 한국 나이로는 20살이었던 2006년의 지방선거 역시 나이 제한으로 인해 선거운동에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있었기에 아빠의 선거 사무실 중 한 곳에서 매일 자원봉사를 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청소도 하고, 찾아오시는 손님들도 맞이하는 등 아빠의 승리를 위해 조용하고 묵묵하게 일을 했다. 저녁시간에는 도시의 핫플레이스를 방문했다. 명함을 돌리는 아빠를 따라 아빠의 이름이 새겨진 띠지를 대각선으로 어깨에 두르고 아빠 옆을 따라다녔다. 아빠의 팬이라며 들어오셔서 잠깐만 드시고 가시라는 곱창집 사장님 덕분에 난생처음 대창과 곱창 맛을 알게 되어 대창과 곱창 마니아의 길로 진입할 수도 있었다.
2010년,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선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아빠의 명함은 직계존비속이나 배우자만이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2주 동안 자체 휴강을 하고 아빠의 승리를 위해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대학시절 내내 성적 우수 장학금에 목숨을 걸던 나에게 높은 학점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아빠의 당선이었다. 00 시장 후보 000이 적힌 띠지를 어깨에 두르고, 아빠의 이름이 커다랗게 새겨진 점퍼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00시의 3개 구를 2주 동안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2012년 총선 당시에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어 안타깝지만 참여하지 못했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역시 총력을 다해 아빠를 도왔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에 아빠의 꿈과 목표가 곧 나의 꿈과 목표였기 때문이다.
후보자의 직계존비속은 팀을 나눠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시간은 제한적이고, 돌아다녀야 할 곳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보통 후보자 팀과 배우자 팀으로 분리해 운동을 하게 된다. 선거운동은 이 주 동안 본격적으로 치러진다. 나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일주일은 아빠와 다녔고, 나머지 한 주는 엄마와 함께 했다. 선거운동을 할 때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은 교회, 성당, 절과 같은 종교시설인데, 아빠를 따라다니던 일주일 동안은 매일 새벽 2시 30분에 기상해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3시 30분에 집을 나서야 했다. 교회나 성당의 새벽 기도, 새벽 미사 시간에 맞춰 정문 앞에서 시민들에게 인사를 건네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신도 분들께 아빠의 명함을 나눠드리며 “은혜받으세요! 은혜 많이 받으세요!”를 외친다. 새벽기도에 늦어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분들은 깜짝 놀란 뒤 돌아보며 “어머! 교회 다니세요?” 아니면 “성당 다니시나 봐요! 호호!”와 같은 말씀으로 화답해 주셨다. 교회도 성당도 다니지 않는 나는 머쓱하게 그저 웃었다. 주말이나 부처님 오신 날 절에 방문을 할 때는 “성불하세요!”를 외쳤다.
아빠 팀에게 중요한 또 다른 장소는 관광버스이다. 총선은 4월에, 지방선거는 6월 초에 치러지기 때문에 관광버스에는 나들이를 가려는 아버님, 어머님들, 즉 잠재적 유권자분들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관광버스가 출발하기 10분 전쯤, 버스에 아빠와 함께 올라타 한 분 한 분께 명함을 드린다. 그리고 후보의 딸이라는 멘트를 절대 잊지 않는다. “000 후보 딸인데요, 저희 아빠께 꼭 좀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릴게요!” 이렇게 말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명함을 드리면 어머님, 아버님들은 “아이고! 딸이야?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꼭 찍어줄게!”하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곤 했다. 아빠는 웃으시며 “제가 이렇게 우리 딸내미까지 엄청 고생시킵니다. 그러니 꼭 당선돼야죠! 허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한 분 한 분 모두 명함을 드리며 인사를 마치고 나면 버스 맨 앞으로 다시 나와 “저희 아빠 꼭 뽑아주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고요!”라고 크게 외치며 밖을 나온다. 그러면 모두가 박수를 쳐주시며 환호해 주셨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차되어있는 버스에 다시 올라탄다.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선거운동에서 유권자분들께 건네는 멘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000 후보 딸인데요, 저희 아빠 꼭 좀 한 표 부탁드릴게요!”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면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흘깃 나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고,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알바 아니냐고,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 선거법상 항상 목에 매달고 다녀야 하는 후보자의 직계존비속이 쓰여 있는 커다란 명찰을 보여주며 진짜 딸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여기서 가장 고마운 분들은 “어머 딸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꼭 아빠 찍어줄게요. 더 열심히 하세요! “ 하시며 사기를 북돋아 주시는 분들이다. 혹은 ”아버지 너무 잘하고 계세요. 이렇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무 감사해요 정말... “과 같은 말씀은 에스프레소 7잔을 원 샷 했을 때보다도 더 큰 에너지와 힘이 되었다.
요즘은 후보자의 배우자는 당연하거니와 아들이나 딸이라고 크게 적힌 점퍼를 입고 선거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면에 있어 이 원조 격은 나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까지만 해도 후보자의 자녀들이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거기다 딸이라고 공개를 하고 얼굴을 드러내며 다니는 풍토 또한 상당히 드물었기에 “000 후보 딸인데요”같은 멘트는 역사적으로 가족 중심주의가 강한 대한민국 유권자분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호응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선거사무실 실무진분들은 딸이라고 크게 적어 점퍼에 새기는 것은 어떻겠냐고 끈질기게 설득해왔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전무했기에 거기까지는 차마 도전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아빠의 당선을 위해서라면 모자, 띠지, 점퍼, 바지, 운동화에도 ‘딸’이라고 써서 도배를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선거운동 기간 중 가장 신이 나고, 흥이 나며, 기운이 솟는 시간은 유세 현장을 지원하는 때이다. 보통 유세는 사람들이 밖에 많이 돌아다니는 금요일 오후나 주말 오후, 혹은 저녁시간에 하게 된다. 강력한 지지를 호소하고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정치 거물들이 다수 참여한다. 유세는 도시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하게 되는데, 이 때는 정치계 거물 인사들을 포함하여 도지사 후보, 도의원 후보, 시의원 후보 여러 명과 이들의 선거운동 인원들, 그리고 퇴근하는 시민들까지 합세한다. 이렇게 되면 유세 현장은 시민들과 지지자들, 아빠의 선거운동 참여인단 모두로 가히 북새통을 이룬다. 그리고 모두가 아빠의 이름 000! 000! 000! 을 외치며 당선이 확실시된 마냥 거대한 잔치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당선은 각 지역 여러 단체들의 지지 여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민 한 분 한 분을 직접적으로 만나 뵙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거운동의 본질인 듯하다. 그러면서 평소 아빠를 지지하던 분들을 동네 슈퍼 앞에서, 공원 앞에서, 아파트 단지 놀이터 안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감동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주위에서 정치를 하려는 아빠를 반대하는 자녀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꿈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유권자분들을 만나 뵙고 그들로부터 얻은 생생한 기쁨과 감격은 나에게 4월의 봄 향기와 같이 포근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따스한 온기는 아빠가 시정 일에 지치고 힘이 들 때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아빠는 더 멋지고 살기 좋은 도시로 00시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10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도 당시 상황들이 생생하게 기억되고, 아빠가 낙선이 되었을 때에도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빠를 아껴주시며 진심을 다해 지지해주셨던 시민 분들과의 이 같은 따뜻한 만남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