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리스트에 체크하며 버텨온 회사의 시간들

by 숫자의언어

직장인이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여는 것은 메일도 메신저도 아니다. 많은 경우 체크리스트다.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 가능하면 끝내야 할 일, 미뤄도 되는 일을 구분해 놓은 목록. 체크리스트는 일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회사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체크리스트는 불안을 정리하는 방식이다

회사에서 불안은 늘 일보다 먼저 온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지, 갑자기 지시가 바뀌지는 않을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순간, 이 막연한 불안은 구체적인 항목으로 바뀐다. 해야 할 일이 글자로 내려오는 순간, 불안은 통제 가능한 상태가 된다. 체크리스트는 일을 관리하기 전에 마음을 정리하는 행위다.


일의 크기는 체크박스가 정한다

같은 업무라도 체크리스트에 어떻게 적히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하나의 큰 항목으로 적힌 일은 하루를 짓누르고, 잘게 쪼개진 항목은 하나씩 지워갈 수 있는 목표가 된다. 일을 잘게 나누는 사람은 스스로를 지치지 않게 만든다. 체크리스트는 업무 능력보다 자기 조절 능력을 보여준다.


체크를 하지 못한 날의 기록

모든 체크리스트가 완성되는 날은 많지 않다. 체크하지 못한 항목이 남아 있는 날도 반복된다. 중요한 건 그 빈칸이다. 그날 무엇이 예상보다 길어졌는지, 어떤 일에 에너지를 소모했는지가 그대로 남는다. 체크리스트는 성취의 기록이 아니라, 현실의 기록이다. 그래서 솔직할수록 도움이 된다.


체크리스트가 말해주는 회사의 구조

체크리스트를 오래 쓰다 보면 회사의 구조가 보인다. 반복해서 올라오는 일, 항상 급하게 추가되는 일,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 계속 남는 일. 개인의 리스트지만, 조직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다. 어떤 항목은 아무리 체크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일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


체크리스트의 마지막 줄

일 잘하는 사람일수록 체크리스트의 마지막에 여백을 남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을 위한 자리다. 회사 생활은 늘 계획 밖에서 일이 생긴다. 여백이 없는 체크리스트는 쉽게 무너진다. 오늘의 체크리스트를 모두 지우는 것보다, 내일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도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일을 다 끝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또 하루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체크박스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회사 생활을 계속해 나갈 힘을 조금씩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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