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의 이름표는 누구를 지키는가

by 숫자의언어

익명의 도시 속 유일한 사유지

회사는 공유의 공간이다. 내 책상도, 내가 앉은 의자도, 심지어 내 시간조차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 회사에서 유일하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작은 영토가 있으니, 바로 탕비실 냉장고의 한 칸이다. 편의점에서 사 온 2+1 행사 음료수나 집에서 싸 온 과일 도시락에 매직으로 삐뚤빼뚤 내 이름을 적어 넣는 행위는 단순한 도난 방지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이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존재 증명이자, 침범받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자아를 지키는 방어선이다.

사라진 샌드위치와 범인 없는 수사극

비극은 가끔 일어난다. 점심시간을 아껴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 3시쯤 허기를 달래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내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샌드위치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고작 몇 천 원짜리 빵의 상실이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가볍게 여기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이며, 나의 성실한 준비가 부정당했다는 허탈함이다. 탕비실 게시판에 "누가 제 샌드위치 먹었나요?"라는 포스트잇을 붙일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 우리는 조직 생활의 냉혹함과 치졸함을 동시에 목격한다.

배려와 이기심이 교차하는 선반 위

냉장고를 열어보면 그 회사의 수준이 보인다. 누군가 쏟은 주스가 그대로 굳어 있거나, 곰팡이가 핀 통들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면 그 조직은 책임감이 결여된 상태일 확률이 높다. 반면, 유통기한이 다 된 공용 우유를 먼저 비우고 새 우유를 채워 넣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있다면 그곳은 아직 희망이 있다. 탕비실은 보지 않는 곳에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함이 시험대에 오르는 무대다. 이름표는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내가 타인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름표 뒤에 숨겨진 개인의 사정

이름표가 붙은 도시락 통에는 각자의 사연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위해 닭가슴살을 넣어두고, 누군가는 병든 노모가 챙겨준 보약을 넣어둔다. 또 누군가는 퇴근 후 운동 가기 전 먹을 에너지 바를 소중히 보관한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우리는 동료들의 사생활 일부분을 슬쩍 엿보게 된다. "김 대리님 요즘 건강 챙기시나 봐요"라는 말 한마디가 시작되는 곳도 여기다. 이름표는 차가운 소유의 표시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작은 공간에서 배우는 공존의 법칙

결국 탕비실 냉장고는 작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내 것을 소중히 여기듯 남의 것도 아껴야 하며, 공용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모두가 편안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이곳에서 배운다.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가 야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서로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려는 합리적인 소통 방식일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시며, 이 거대한 조직 속에서 나의 자리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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