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라는 공간에 들어서면, 말의 의미가 조금씩 바뀐다.
학교에서 “참아라”는 말은 훈육에 가까웠고, 집에서의 “참아라”는 걱정이 섞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참아라”는 대체로 이유가 없다. 설명도 없고, 끝도 없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전제만 있을 뿐이다.
“이번만 참아.”
“지금은 네가 이해해.”
“다들 그렇게 버텼어.”
이 말들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침묵을 요구하는 명령에 가깝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를 말하지 말라는 신호다. 회사에서 ‘참는다’는 건 감정을 누르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접는 일이고, 생각을 줄이는 일이며, 결국은 나를 조용히 축소하는 과정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많은 감정이 “개인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부당함을 느껴도 예민한 사람이 되고, 힘들다고 말하면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먼저 말한다. 참자. 지금 말해봐야 달라질 건 없어. 그렇게 한 번, 두 번 말을 삼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말할 필요 자체를 잊어버린다.
회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열정이 아니다. 이름이다.
“누구누구 씨” 대신 “그거 맡은 사람”, “이 건 담당자”, “그냥 거기 있는 사람”으로 불리기 시작할 때, 나는 조금씩 역할이 된다. 감정이 없는 존재,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부품 같은 존재. 그 상태에서 “참아라”는 말은 너무나도 효율적이다. 부품은 고장 나지 않는 게 가장 좋으니까.
아이러니한 건, 이 ‘참음’이 능력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잘 참는 사람은 조직에 잘 적응한 사람이고, 말을 아끼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며,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프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성숙한 걸까, 아니면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너무 많이 배운 사람일까.
회사에서의 피로는 대부분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말들에서 온다.
무심한 비교, 당연하다는 전제, 설명 없는 지시,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참아라”라는 말. 이 말은 사람을 단번에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아프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참고 있을까.
정말로 참아야 해서일까, 아니면 참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일까. 회사는 늘 “조금만 더”를 말하지만, 그 ‘조금’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출근하고, 업무를 하고, 마음속에서 한 문장을 반복한다. 지금은 참아야지.
하지만 모든 참음이 미덕은 아니다.
어떤 참음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만, 어떤 참음은 나를 무디게 만든다. 회사에서의 ‘참아라’가 후자에 가깝다면, 우리는 그 말을 조금 의심해봐야 한다. 이 참음이 나를 지키는 선택인지, 아니면 나를 지워가는 과정인지 말이다.
어쩌면 진짜 용기는 더 많이 참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말해보는 것, 작게라도 불편함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괜찮다”가 아니라 “힘들다”라고 말해주는 것. 회사라는 공간에서 그 말이 가장 어려운 말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참아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공간에서,
오늘만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나는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