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형광등은 늘 같은 밝기로 빛났지만, 영실의 눈에는 그 빛이 점점 더 희게 번져 보였다. 하루 종일 서서 계산대를 지키다 보면 시간 감각이 흐려졌다. 오전 아홉 시에 들어와 저녁 아홉 시가 되기까지, 영실은 수십 번 “봉투 필요하세요?”라고 물었고, 수십 번 “영수증은요?”라고 말했다.
기름진 도시락 뚜껑을 열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컵라면에 물을 붓고, 택배를 찾으러 온 손님에게 무거운 상자를 건넸다. 중간중간 취객이 들어와 계산대에 몸을 기대며 괜히 말을 걸었다.
“학생, 힘들지?”
영실은 웃지 않고도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발뒤꿈치가 욱신거렸다. 허리가 굽어졌다. 손은 거칠어졌다.
퇴근 시간이 되어 가게 문을 밀고 나오자 밤공기가 목을 훑고 지나갔다. 편의점 안에 남아 있던 따뜻한 공기와는 달랐다. 차갑고, 현실적인 공기였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영실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설마.’
받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받지 않으면 더 불안했다.
“여보세요.”
“임영실 씨 되시죠?”
“네.”
“어머님이 지금 경찰서에 계세요.”
영실은 눈을 감았다.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장면이었다.
“어떤 집에 들어가셔서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셨어요. 신고가 들어와서 모셨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이 미친놈들아! 다 짜고 나를 지하실에 가둬놓고 돈 빼돌렸지! 내 돈 내놔!”
영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영실도 일어섰다. 버스에 올라 창가에 앉았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스물한 살이 아니라 마흔쯤 되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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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원래 말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졌을 때도 엄마는 한숨 대신 행동을 택했다.
“조금만 참으면 되니 힘내자.”
그 말은 주문처럼 반복되었다.
지하 단칸방으로 내려간 날, 엄마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지만, '환기하면 괜찮다'라고 말했다. 여름이면 물이 차올랐고, 겨울이면 냉기가 벽을 타고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돈을 모았다. 그 돈은 전셋집으로 옮기기 위한 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은 외삼촌에게 건너갔다. 외삼촌은 외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했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동생을 믿었다. 동생이 잘되면 가족이 모두 잘될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날 이후, 밤마다 술 냄새가 집을 진동했다.
“빨리 가서, 돈 받아와!”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은 엄마를 밀쳤고, 어느 날은 멱살을 잡았다.
얼마 뒤, 외삼촌이 자살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날 이후, 엄마의 말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누가 내 돈을 빼돌렸어.”
“다 짜고 나를 이런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실에 가둬놨어.”
"너희 아빠가 다른 년한테 내 돈을 다 줬다고."
처음엔 한두 번이었다. 그러다 점점 늘어났다. 병원에 가보자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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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멈췄다. 영실은 경찰서 앞에서 내렸다. 경찰서 형광등은 편의점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은 삐쩍 말랐고,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영실을 보자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쟤네가 다 한 패야! 네 아빠도! 다 내 돈 빼돌렸어!”
경찰이 크게 말했다.
“어머님, 계속 이러시면 유치장 들어갑니다!”
영실은 엄마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갑고 가벼웠다.
“엄마, 제발. 조용히 해. 창피하다고.”
엄마는 잠시 영실을 바라보더니 조용해졌다.
경찰이 영실을 따로 불렀다.
“지금 주거 침입으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진단서 제출 안 하면 처벌될 수 있어요.”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돈이 없어요.”
경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국립 병원 추천서 써드릴게요. 비용은 저렴합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영실은 엄마를 방에 눕혔다. 방은 두 칸이었고, 그중 한 칸은 영실과 엄마가 함께 썼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출근하려고 문을 나설 때 영실이 말했다.
“아빠, 엄마를 병원에 입원 안 시키면 교도소 갈 수도 있대요.”
아버지는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등에 대고 영실은 소리쳤다.
“제가 입원시킬게요.”
아버지는 영실의 말에 대꾸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영실은 며칠을 고민하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엄마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뭐?”
“돈가스. 엄마 좋아하잖아. 남산 돈가스.”
엄마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환청에 시달리던 눈빛이 잠깐 멈췄다.
“남산?”
영실은 엄마와 함께 남산으로 향했다. 날씨는 따뜻했고, 하늘은 맑았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천천히 공중을 맴돌다 사람들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유모차를 미는 부부, 손을 꼭 잡은 연인,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친구들. 그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영실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의 손은 예전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여기 참 좋다.”
엄마가 말했다. 영실은 엄마를 바라봤다. 벚꽃 잎이 엄마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엄마는 잠시 그 꽃잎을 손으로 만지더니,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희 아빠랑 처음 남산 왔을 때도 벚꽃이 이렇게 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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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 엄마는 연한 베이지색 코트를 입었고, 생머리가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아빠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날은 괜히 아무 말이나 많이 했다.
“남산이 많이 높죠?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전망대예요.”
엄마는 숨이 차면서도 웃었다.
벚꽃이 흩날렸고, 바람이 불 때마다 엄마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쳤다. 아빠는 어색하게 손을 뻗어 엄마 이마에 붙은 벚꽃 잎을 떼어냈다.
“꽃잎이 붙어서요.”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채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엄마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날 남산은 유난히 밝았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고 믿었다. 전망대를 내려오며 아빠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돈가스 먹고 갈래요?”
그 시절 남산 돈가스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처럼 되어 있었다. 식당 안은 분주했고, 나무 테이블은 빛이 바래 있었다. 하얀 접시 위에 큼지막한 돈가스가 놓였다. 겉은 바삭하게 튀겨져 있었고, 칼을 대자 ‘사각’ 소리가 났다. 고기는 두툼했고, 육즙이 안쪽에서 천천히 번졌다. 갈색 소스가 넉넉하게 끼얹어져 있었고, 양배추 샐러드 위에는 새콤한 드레싱이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집 특유의 수프. 얇은 금속 그릇에 담겨 나온 노란 크림수프는 따뜻했고, 후추 향이 살짝 올라왔다. 엄마는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먹었다.
“맛있어요.”
아빠는 엄마의 맛있다는 말에 어깨를 우쭐거리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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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참 좋았는데.”
엄마는 머리에 붙은 벚꽃 잎을 떼어내며 말했다. 영실은 순간 엄마가 제정신이 돌아왔나 착각했다.
남산 돈가스 집에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기름 냄새와 소스 향이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영실은 창가 자리에 엄마를 앉혔다.
“돈가스 두 개요.”
수프가 먼저 나왔다. 엄마는 그걸 보자 잠시 손을 멈췄다.
“여긴… 그대로네.”
영실은 조용히 엄마의 돈가스를 잘랐다. 칼이 바삭한 튀김을 가르며 고기 결을 따라 내려갔다. 소스가 접시에 번졌다.
“내가 해줄게.”
엄마가 어릴 적 영실에게 해주던 말을, 이제 영실이 엄마에게 했다. 엄마는 작은 아이처럼 기다렸다가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엄마의 말에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엄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듯, 평소보다 아주 천천히 돈가스를 먹었다.
수프 한 숟가락, 돈가스 한 조각, 양배추 조금.
식당을 나서자 벚꽃이 더 많이 흩날리고 있었다.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영실의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엄마는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해했다.
“여기 어디야? 어디 가는 거야?”
영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병원 간판이 보였다. 엄마는 멈춰 섰다.
“병원 아니야? 왜 왔어?”
엄마의 눈이 흔들렸다. 영실은 엄마의 손을 꽉 잡았다.
“엄마…”
그 순간,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다가왔다.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영실아! 나 두고 가지 마! 너까지 나 버리면 안 돼. 니 아버지 말 들으면 안 돼.”
엄마는 끌려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소리가 차단됐다. 영실은 그 정적 속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여전히 벚꽃이 흩날렸다.
병원 문이 닫힌 뒤에도 그 소리는 오래 남아 영실을 괴롭혔다.
“영실아! 나 두고 가지 마!”
병원 복도에 서 있던 영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이 오갔고, 간호사들이 분주히 걸어 다녔지만 그 장면은 느리게 흘렀다.
입원 수속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기억이 흐릿했다. 집에 도착하자 방 안은 조용했다. 영실은 엄마의 방에 들어갔다. 이불은 반쯤 젖혀져 있었고, 베개 위에는 머리카락 몇 올이 남아 있었다. 방 안에는 엄마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영실은 서랍을 열었다.
엄마의 속옷을 꺼냈다. 얇고 낡은 면 속옷.
엄마의 양말을 꺼냈다. 뒤꿈치가 닳아 있었다.
엄마의 칫솔을 챙기고, 수건을 접고, 얇은 가디건을 넣었다. 하나씩 가방에 넣을수록 엄마의 삶이 접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옷을 정리하다가 손이 멈췄다. 옷장 안쪽에 검은 비닐봉지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젊은 엄마와 아빠가 남산에서 찍은 사진들.
엄마는 수줍게 웃고 있었고, 아빠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뒤에는 벚꽃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영실은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저 사람이… 내 엄마였지.’
지금의 삐쩍 마르고, 환청에 시달리며 허공을 향해 소리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진 속 엄마는 진짜 엄마였다. 볼이 통통하고 눈빛이 살아 있던, 영실을 사랑해 주고 영실이 기댈 수 있었던 엄마였다.
영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짐을 넣던 가방을 잡은 채로, 소리 없이 울다가, 결국 통곡이 터져 나왔다.
“엄마… 엄마…”
방 안에 울음이 퍼졌다.
“내가 꼭 돈 많이 벌어서… 엄마가 살고 싶다던 집에서 살게 해 줄게. 실내에 화장실 있고, 햇빛 잘 들어오는 집. 곰팡이 없는 집. 내가 꼭 그렇게 해 줄게.”
영실은 휴학을 연장했고, 일을 더 늘렸다.
낮에는 편의점, 밤에는 카페. 주말에는 건물 청소 아르바이트까지.
영실에게 대학은 사치였다. 엄마를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예전의 진짜 엄마로 돌아올 것 같았다. 하루하루 몸은 지쳤지만, 통장 잔고는 늘었다.
‘아파트.’
그 단어는 목표가 되었고, 주문이 되었고, 이유가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밤마다 술로 지새우던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들러 엄마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지만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 엄마도 조용히 숨을 멈췄다. 영실은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픔을 계속 견뎌왔기에 흘릴 눈물이 없었다.
그 후로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영실은 학교를 마쳤고, 직장을 얻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 날, 부동산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여기, 햇빛 잘 들어와요. 남향이에요.”
부동산 중개인이 말했다.
베란다 문을 열자 따뜻한 빛이 거실로 들어왔다. 실내에 화장실이 있었고, 곰팡이 냄새도 없고, 벽지는 깨끗했다. 영실은 거실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엄마…’
약속은 지켰다. 그러나 엄마는 없다.
몇 년 뒤, 가족과 함께 남산에 올랐다. 아이들은 신나서 앞서 뛰어갔다.
“아빠! 빨리 와!”
벚꽃이 또 흩날리고 있었다. 영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들 둘러봤다. 어딘가에서 엄마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남산 돈가스 집에 들어갔다. 여전히 수프가 먼저 나왔다.
얇은 금속 그릇, 노란 수프, 후추 향.
아이들의 돈가스를 잘라주며 영실은 말했다.
“내가 해줄게.”
돈가스는 여전히 바삭했고, 소스는 넉넉했고, 양배추는 신선했다.
돈가스를 한 입 베어 물다 영실은 문득 깨달았다.
'엄마가 좋아했던 건 돈가스가 아니었어. 아름답던 그 시절이었어.'
영실은 창밖을 바라봤다. 벚꽃 한 장이 창가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남산 돈가스의 수프는 여전히 따뜻하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