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 본다는 착각

결핍이 많은 그대에게

나는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억울했다.

나는 많이 일하고 책임을 지고 돈을 아끼는데, 아내는 나보다 덜 일하고 취미활동을 하고 놀러 다니고 돈을 많이 썼다.


그 장면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손해 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막상 내가 자전거를 타러 가도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헬스장을 가도 그렇고, 영화를 봐도 그렇다.

타인의 삶이 내 눈에 ‘즐거움’으로 보일 뿐, 그 행위 자체가 절대적인 행복은 아니었다. 내가 부러워했던 건 그 사람의 삶이 아니라 내가 만든 이미지였다. 나는 실제의 삶을 본 게 아니라 “여유 있어 보이는 장면”을 본 것이다.




손해감의 구조

내 분노의 구조는 단순했다. 나는 많이 한다. 상대는 적게 한다. 그런데 더 즐기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바보가 된다. 이건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성의 문제였다.


절대적인 힘듦은 견딜 수 있다. 상대적 불공정은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그 불공정은 사실 비교에서 나온 착각이었다.




내가 진짜 원했던 것

나는 놀러 다니는 삶을 원했던 게 아니다.


내가 원한 건

내가 정한 속도

내가 선택한 일

내가 그은 경계

내가 만든 리듬

이었다.


넓은 카페에서 조용히 몰입해 일하다 보면 차분해진다. 오히려 좋기까지 하다.

그 순간 알았다. 나는 자극형 행복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중형 안정감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비교가 사라질 때

내가 내 리듬으로 쉬고 내 기준으로 돈을 쓰고 내 속도로 일하기 시작하니 아내의 삶은 점점 덜 중요해졌다.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그저 비교 회로가 약해졌을 뿐이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타인의 여유는 공격처럼 느껴진다. 에너지가 차면 타인의 삶은 배경 소음이 된다.



나는 손해 보고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과로 상태에서 남의 장면을 부러워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이 피곤이 아니라 몰입이 되고, 내 삶에 만족이 쌓이면 타인의 방식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

행복은 더 많이 노는 데 있지 않았다. 행복은 내가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감각에 있었다.

손해 본다는 느낌은 비교가 만든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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