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원래 비이성적인 거예요.”
오늘부로 내게 <중경삼림>은 22년 5월 1일 전, 후로 나뉜다.
어제의 <중경삼림>은 ‘한 여름날 기차 소파에 쏟은 끈적끈적한 사이다’같은 영화였다. 무단침입에 사랑도 모르겠는데, 그냥 필름 감성을 좋아하는 마니아를 가지고 있는 영화.
‘홍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봐도 내겐 그닥 끌리지 않는 영화였다.
오늘 메가박스에 포스터를 가지러 간 나는 <중경삼림>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 영화는 작은 OTT세상에서 보면 안 되는 영화였다. 영화관에서 보자 모든 게 보인다. ‘마약’ 때문에, ‘사랑’ 때문에 젖어들어가는 영화였다. ‘비이성’이란 단어의 물에 영화 필름을 푸욱 젖게 한 다음 햇살 좋은 날 말리면 그게 <중경삼림>이 되는 거였다.
처음 <중경삼림>을 봤을 때, 나는 금성무가 왜 2편까지 안 나오냐며, 님들이 댓글로 남긴 저 시절의 청년이었고 이제는 아저씨일 양조위의 눈빛엔 속지 않는다며 금성무를 찾았다. 양조위의 속옷 씬은 마치 마케팅원론 시간에 교수님이 기업의 친환경 소재로 언급한 ‘기저귀’가 생각났다. ‘다 큰 어른이 하기스 기저귀를 입은 것 같은 저 씬은 뭐란 말인감’하면서 봤는데, 아니. 그것은 단 하나의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은 비이성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존재한다. 이 영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사랑은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다.
‘비이성’… ‘팬’이란 이름의 사랑이 이성적이지 못해 힘겨워하던 날 깨운 단어이기도 했다.
나는 왜 기이한 팬덤 문화에 흡수되지 못하고, 겉돌고 불편한 것들이 많나. But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Nevertheless 왜 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가 대체 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 나에게 말했다.
“언니. 사랑은 원래 비이성적인 거예요.”
Yes. 사랑은 비이성적인 거였다. 그제야 몇 번이고 되새겼던 타블로의 말이 없는 청중도 만들어내 듯 내 앞에 PPT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믿으면서, TV에서 한 순간에 연예인을 향해 사랑에 빠진 것은 좀처럼 믿지 않죠.”
그동안 나는 사랑을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이성적인 사랑을 몇 번을 경험했어도 내겐 모든 결과는 이성적이었다. 나와 잘 맞았던 사람과의 사랑의 장면 중엔 ‘타인들이 보면 이상할 장면’들이 존재했으나, 그것은 그와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성적일 수 없으나,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느낌적인 느낌 같은 것이었다. 좀처럼 또렷하고 합리적이게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한데, 굳이 그런대로 답답하게 놔둬서 남들에겐 증명할 필요 없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의 순간과 장면들이 가득 차야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비이성적인 순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이었고, 이성적인 순간들을 헤아려 보는 깨달음의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그와 ‘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사랑은 몹시 많았다. 향기도, 그리움도 남지 않아서 혼자서 “외로웠다”고 말하는 장면들이 더 많았다. 내게 사랑은 그래서 이유가 필요했다. 첫눈에 반하는 것 이상으로 이성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내가 ‘팬’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 사람은 환상적이에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몇 퍼센트의 유형이잖아요.’ 따위의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야 연예인이 존재하고, 그 밑에 팬덤이 있고, 아주 조금의 교집합을 비집고 들어가는 게 나였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잠시 잠깐의 환상은 성인이 되어서 방청을 하다 보면 깨닫는다. 다 큰 성인이 돼가지고 4열 종대로 무릎 꿇고 몇 시간을 기다리다 아주 잠시 잠깐 사전녹화만 뜨고 들어가 버리는 우리네 오빠들을 보면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엔 외로운 것이다. 콘서트 이후에 바닥에 남겨진 꽃가루가 짓밟힌 것을 보며 깨닫는 것이다. 수많은 불빛이 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제어되는 응원봉을 든 존재가 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우리네 오빠의 노래를 순위권에 들게 하기 위해 설레임 깃든 듣기가 아니라 스트리밍 목록을 돌리고, 무릎 꿇은 사람들 사이로 캐시를 삭제하며 스트리밍 하며 증명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혹시나 생일이라면 더욱이 그 사랑의 증명 값은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조공이다. 우리네 오빠가 호기롭게 증명해준 날에 그것을 내가 보낸 것임을 증명할 때. 우리네 오빠가 출근하거나 퇴근할 때 다정한 인사말과 함께 프리뷰 사진을 남기는 것이 ‘찐 사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엔 단계가 있어서 ‘잡덕’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가 어느 날엔 ‘성덕’이 되어서 미움을 받는 것이었다. 나를 향한 미움은 사랑에 가까운 행위자들이 하는 거였으며, 그런 비난을 감내하는 것조차 사랑의 영역에 포함되는 게 ‘팬’이란 존재의 사랑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사랑한다고?
<중경삼림>은 말한다. “야. 사랑은 원래 비이성적인 거야.”
스쳐가는 사람들이 인연이 되고, 오늘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반하고자 다짐하고 말을 걸다가 어벙벙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허기진 마음에 배를 채우다가 모든 걸 포기할까 하다가 끝내 탐정이 알아내고야 말아야 끝이 나는 사건처럼 생일을 축하한단 메시지를 받곤 내 존재를 누군가 알아줬음에 기억에 유통기한을 비유하는 것이다.
베개 밑에서 발견한 남의 머리카락의 길이를 돋보기로 재보다가 사랑하는 이의 근처에 알랑이는 이의 머리카락의 길이를 세보는 것. 비가 억세게 오는 날에 꼭 사랑이 이뤄지고, 얼렁뚱땅 천방지축으로 돌아가다가 호기심에 사랑에 빠져선 다시 호기심에 셔터를 열어보는 것이다.
누구도 메시지를 남기라고 하지 않아도, 누가 한 번 1년 동안 기다려보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 따윈 없다. 싸랑은 가슴이 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튀는 장면이 있다면 가발을 쓰고 그녀로 위장해 인위적 분장으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 그리움을 말하지 않고 인위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뿐이다. 그들은 엑스트라다.
‘첫눈에 반했다’라던가 ‘사실 저는 차인지 굉장히 오래됐고, 5분 전에 들어오는 첫 손님을 사랑하기로 했는데, 당신이어서 말을 걸어봅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그냥 냅다 일단 용기 내서 들이대는 게 사랑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로 받아들여서 스토커 짓을 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한 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살갗이 부딪히는 것처럼 숨 막히다가 차가운 개울물에 발을 담그듯 시원해지는 것. <중경삼림>이었다.
<중경삼림>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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