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을 사 먹는 시대

by 유과스

오랫동안 균은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병을 일으키는 존재였고,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hy가 유산균을 담은 발효유를 처음 소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세균을 왜 돈 주고 사 먹느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신뢰를 쌓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중심에는 방문 판매원, 이른바 ‘야쿠르트 아줌마’가 있었다.

(지금은 '프레시 매니저'라고 불리운다.)


당시에는 가가호호 냉장고가 있는 집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발효유는 늘 차갑게 보관해야 하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판매원들은 얼음을 넣은 보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 가방이 곧 이동식 냉장고였다.


이들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걸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문을 여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내 건네며,

유산균은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배송 조직의 중심에는 주부들이 있었다.

집안일 사이 시간을 내 동네를 돌던 이들은

이웃에게 제품을 권하고 함께 나누며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만들었다.

이 작은 구전이 발효유를 일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첫 시작은 동대문에서 활동하던 47명이었다.

지금은 전국 1만 1천여 명이 같은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첨부사진1]균을 사 먹는 시대.jpg
1990년대.jpg

그렇게 전해진 이 음료는 사람들에게 낯선 경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맛이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마셔 본 사람들 가운데는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이렇게 시냐”, “상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는데,

이는 우유에서 느껴보지 못한 새콤한 맛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비교적 빨리 적응했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간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낯설던 맛도 매일 한 병씩 마시다 보니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 그 풍미는 발효유의 매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익숙해졌지만, 한 가지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걸 왜 먹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는 계속됐다.

초기에는 해외에서 종균을 들여와 배양해 사용했다.

배양은 가능했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외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균은 살아 있었지만, ‘우리 것’은 아니었다.


연구원들은 직접 균을 찾기 시작했다.


유아의 분변과 모유 등에서 유익한 균을 분리해냈다.

출발점은 찾았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배양액을 버리는 날이 이어졌고,

며칠만 손을 놓아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명절 연휴에도 휴가를 미루고 실험을 이어갔다.

그렇게 쌓인 시간 끝에 조금씩 ‘우리 균’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마침내 유산균 국산 종균화가 이루어졌다.

외부에 의존하던 균을 처음으로 스스로 확보한 순간이었다.

남의 균을 빌려 쓰던 시대가 이때 끝났다.


이후 연구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확보한 균의 기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시작했고,

일부 균주는 미국 FDA의 신규식이원료(NDI)로 등록됐으며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개별인정형 기능성 원료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 흐름은 제품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많은 제품들이 유산균의 ‘수’를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균이 사용됐는지다.

hy는 사용된 균주번호를 함께 공개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스트레인제품.jpg

균주번호는 특정 미생물을 식별하는 고유한 이름으로,

해당 균이 어떤 연구와 검증을 거쳤는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단순히 많이 담는 것을 넘어, 무엇을 담았는지 설명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균은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균을 사 먹는다.

그리고 이제는 균에 대해 설명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이름도 없던 존재에서, 근거와 함께 이야기되는 존재로.

우리는 지금, 그 변화를 지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유산균 주민등록증: 균주 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