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사양의 사전적 의미는
1. 저녁때의 햇빛, 저녁때의 저무는 해
2. 새로운 것에 의해 몰락해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이 소설은 일본의 패전 이후 몰락한 귀족의 삶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여기서 가즈코는 여주인공으로서 정신과 육체 모두
‘귀족’처럼 살아가는 건강하지 않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세상의 일은 세상의 일을 잘하는
사람(삼촌)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그저 잘 가꿔진 정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즈코는 전쟁 당시 노역으로 차출되어
‘노동’을 처음 경험해 본 사람이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본 사람이었고,
유부남이었던 장교의 배려로 노동장에서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나간 인물이었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폐병을 (마음의 병) 앓게 된다.
결국엔 남편과 이혼을 하고
그 대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오해까지 들으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사산하게 된다.
동생인 나오지는 전쟁에서 귀환한 군인으로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머니와 누나의 돈을 훔쳐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모녀의 생활비를 관리하던 삼촌은
더 이상 돈이 없으니
이즈라는 시골로 내려가 살 것을 권하며
그렇게 이 소설은 어느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이사를 온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이 소설을 독해할 때
어머니를 몰락한 귀족,
가즈코를 변화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인물,
나오지를 자신의 귀족인 신분을 놓지 않고
현실 사이에서 마주한 괴리감에
자살한 인물로 해석한다.
분명, 어머니는 생활비 문제로 나즈코에게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갈 것을 권하지만
강제성은 높지 않았다.
그리고 가즈코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싫다며,
차라리 밖에 나가서
본인이 일을 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나오지가 자살 전 나즈코에게 쓴 편지처럼,
나즈코는 혼자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여력이
남아있는 존재로 비친다.
그래서 어머니는 과거에 살았던 시대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자연스럽게 죽길 바랐다.
하지만 가즈코는 이런 어머니의 생각에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하나는 어머니가 오래도록 살길 바란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소설적 표현으론
자신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갈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론 어머니가 하루빨리 세상을
떠나길 바라는 것이었다.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24시간 어머니를 간병하는
가즈코는 곧 있으면 사망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 집을 벗어나 자신의 인생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가즈코는 소설에서 처음으로 우울한 독백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녀의 삶은
오로지 가족의 죽음 이후에만 오는 것이었다.
30살이 되어서도, 결혼을 해서도,
어머니의 안위와 동생의 사생활 문제를 처리하면서
다녀야 하는 ‘가족 돌봄 노동자’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혁명을 위해선 부도덕함을 행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곤 본인을 희생자,
도덕적 과도기의 희생자라고 일컫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부남, 매일 밤 여자들과 술을 마시며 노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이 도덕적 혁명의 완성이라고.
삶의 목표가 없던 그 시절,
유일하게 살아야 할 목표를 준 나오지의 스승에게서
가즈코는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혁명은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아이’를 갖기 위한 도구적인 수단은 아니었는지 의문이다.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새 생명’을 낳는 행위는
아이에겐 폭력적인 일이 아닌가.
물론,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 사람은 다시 그 국가를 위해 재편되는 시스템에
재진입 한다는 의미에서
가즈코의 행동이 혁명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비틀어진 마음이라도
그녀를 미래로 향해 한 발 나아가게 해주었다면,
이제까지 세상을 너무 몰랐다는 가즈코의 말은
일말의 희망적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는 것일까.
남들이 베풀어 주는 걸 받는 게 너무 두려워.
특히나 그 사람이 맨주먹으로 땀 흘려 번 돈으로 대접받는다는 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이 막히는 일이라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난 귀족이야.
(나오지 유서의 내용 중 일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끄러움’은
‘자본’이 없을 때 생겨난다.
그 사실을 체험한 나오지는 나름의 방식대로
그 괴리감을 좁히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엔 자살을 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평민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쟁은 모두의 삶을 파괴시켰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귀족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
그 무리 안으로 무리하게 비집고
들어서려는 행동이 문제였는지,
본질적으로 자신은 귀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너희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고 체험해 보겠다’라는
스탠스를 지닌 채로 살아가 그랬는지,
아니면 전쟁의 트라우마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려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나오지는 여전히 귀족으로 남길 바랐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필요한 ‘돈’이 없는 명예를 가진 존재로.
하지만 전쟁 이후 그 귀족이라는 특권도
신헌법을 시행하면서 폐지되었으니
사회적으로 귀족은 없었다.
세계는 천황과 신하라는 이분법만이 남게 되었다.
전쟁은 여러 방식으로 사람을 죽여
계급 체계의 견고함과 격차를 벌려놓은 것이었다.
그 격차 안으로 미끄러진 건
평민의 입장에서 보기에
나오지를 향한 혁명인가 아닌가.
결국 이 소설은
전쟁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전쟁의 폐해를 직접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분명, 기득권층의 몰락이라는 점에서,
그 몰락을 들여다보고 관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었다.
가즈코는 아이를 통해 혁명을 이뤄내고자 했지만
현대에서 그 혁명은 무너진지 오래다.
지지기반이 무너진 이곳은
나오지가 미끄러진 틈으로
계속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혁명은 무엇인가.
높이,
폐부를 향해 날카롭게,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사양의 영향권 안에 들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혁명을 시작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몰락한 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몰락하지 않은 자의 성공담을 듣고,
그처럼 살길 바라는데,
그런데 결국,
이 욕망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부여한 노역이지 않는가.
그래서 가즈코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가즈코는 혁명을 완수했을까.
이 질문은 언제 멈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