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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우 Oct 29. 2019

'추억', 꿈을 추억하다

꿈을 노래하다


난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원을 다니기 싫다고 하니 부모님께서는 기꺼이 그러라 해주었다. 대학입시에만 맞춰진 대한민국 공부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준 부모님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다. 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공부는 거의 손을 놓았지만 꿈을 가질 수는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이유 없이 공부하다가 꿈이 구체화되기도 되는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난 정 반대였다.


어린 시절에는 보기 싫은 사회적 이슈나 현실의 삭막함을 경험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집에 돌아와 애니메이션 채널을 틀었다. 물론 숙제는 하지 않았다. 내 세대가 거의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체벌을 경험한 세대여서 숙제를 안 하고 가면 엎드리거나 손바닥을 맞기 일쑤였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거나 친구들과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곳에는 꿈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은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였다. 지금처럼 미취학 아동을 초점으로 방영하는 것이 아니라, 초, 중학생도 보는 애니메이션이 많이 수입되었다. 원어를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주제곡들은 우리나라의 대중 가수들이나 성우가 직접 녹음하여 불러주었다. 걔 중에는 유명한 곡들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곡의 주제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꿈이었다. 그곳에는 우리의 꿈이 있었고, 노래했다.


어린 시절에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유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미래가 두렵고 불안한 20대를 살고 있는 지금, 과거 우리가 듣던 애니메이션의 가사들은 어린 시절에 들었을 때랑은 다른 느낌을 준다. 그저 유치하다는 느낌과는 다르다.


꿈에 대한 자극은 어린 시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기부여의 방법만 다를 뿐 나이가 들어서도 필요한데, 우리는 사회적인 신분, 빈부격차에 의해 이미 출발선부터 다른 불공평함에 꿈 대신 상대적 박탈감만 받고 있다. 꿈을 꾸었던 세대는 더 이상을 꿈을 꾸지 못하고,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주저앉아버리기 일쑤다.


꿈을 경험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패키지 형태의 게임을 접했다. 내가 제일 처음 해본 게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게임이다.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의감이 들 때마다 여러 번 플레이할 정도의 게임인데, 지금은 취미지만 한 때 직업으로써의 음악인을 꿈꾸게 된 계기는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접한 패키지 게임의 캐릭터들은 각지를 여행하며 음악을 매개체로 목표를 달성하는 서사를 그리고 있었다. 음악 여행이란 어린 내게 낭만적으로 들려왔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음악을 들려주고 세계를 여행하는 일.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아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포기했지만, 음악이라는 일 자체를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은 없다.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을 간접 체험해보고 그들이 여행하면서 접하는 인간관계, 사건의 전개, 단순 스토리 진행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대사들까지.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세계, 스토리가 중시되는 전통적인 롤플레잉 게임을 접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부류의 게임에 빠지게 되었다. 한 때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고, 지금은 그게 이어져서 글쓰기와 담을 쌓지 않고 지금도 작가라는 꿈을 조금이나마 꾸고 있다. 게임은 어린 시절 내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꿈의 원천이기도 하다.


꿈의 사막화


가상현실 매체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과 다르게 학교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결 매체 중 하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학교는 꿈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학교라고 부를 수 없다. 어쩌면 학원만도 못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지식과 지도라는 두 개의 역할이 있는데 지식은 이미 학원보다 못 가르치는 학교가 태반이고 지도(指導)는 커녕 지도(地圖)를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에서는 하위권 학생들도 힘을 싣을 수 있게 해 주고 꿈을 찾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하며 고민이 있다면 진심으로 받아주어야 한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 차별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름을 인정하고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적이다. 현실적으로 이는 어렵고, 대한민국의 학력 인플레이션 덕분에 교육의 초점이 대학에만 치중되어, 꿈이라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 그저 꿈을 꾸는 것마저 사치라고 여기라 강요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던가? 학교와 사회가 다른 점은 꿈의 유무이다. 사회는 냉정하기 때문에 그저 꿈을 외치다가는 사장당하지만, 학교는 꿈을 외쳐야 하는 곳이다. 비교와 차별은 꿈을 꿀 수 없는 환경을 선물한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꿈에 관해서 진보적 관점으로 모두가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돈이 없더라도 꿈을 꾸는 것에는 빈부의 격차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에서 꾸는 꿈조차도 돈으로 움직일 수 있게 제도화되어있다. 꿈의 사막화가 진행되는 곳, 이것이 대한민국 대다수 학교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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