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토일드라마 <닥터 슬럼프(2024)>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마크 맨슨이 한 나라를 방문한 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 하나가 화제가 됐다. 영상의 제목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였고, 그가 여행한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마크 맨슨은 한국이 경제, 문화적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깊은 우울증과 외로움을 앓고 있다고 보았다. “경쟁의 일상화”로 가득한 한국 사회. 성과를 내기 위해 사회적 압력과 경쟁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란 사실이 오랜 시간 입증되면서 한국인들은 이런 치열한 생태계를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살아왔다. 완벽주의가 많은 한국. ‘전부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잘못된 사고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아프고 머릿속이 저릿했다. 내가 바로 한국에 흔해 빠진 완벽주의자였기에.
Jtbc토일드라마 <닥터슬럼프(2024)> 속 남하늘(박신혜 분)이란 인물은 마크 맨슨이 영상에서 말한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한국”을 압축해 놓은 인물처럼 보인다. 하늘은 머리가 좋았고, 공부도 잘한다. 그럼에도 하늘은 1등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독하게 공부한다. 그런 하늘이 정우(박형식 분)가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 최악의 라이벌이 된다. 하늘을 만나기 전까지 정우는 여유 있게 일등을 지켰다면, 하늘이 전학 온 뒤로는 그녀만큼 독하게 공부한다. 청양고추를 씹어 먹으면서 잠을 쫓고, 화장실을 자주가게 하는 커피 대신 믹스커피를 물 없이 삼켜 먹으며, 제일 먼저 학교에 등교하고, 1초라도 아끼기 위해 뛰어다녔다. 열심을 넘어선 치열한 매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서로에게 유치한 짓도 하는 ‘추억’이라 불릴 만한 낭만도 있었다. 이미 수년간 해온 경쟁은 사회에 나오면서 본격적이 된다. 추억이라 불릴 만한 걸 쌓을 틈 없이, 잠 한숨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한 끼 배불리 먹을 시간 없이 몸과 마음이 축 나도록 일한다.
우리 사회에 내포되어 있는 ‘경쟁’은 개인의 야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마크 맨슨은 ‘생존’의 문제라고 해석했다. 주류라고 불리는 부류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떠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더라도 그 모든 노력은 nothing이 된다. 설사 지금, 주류에 속해 있다 하더도 한 발만 삐끗하면 모두 등을 돌리는 nothing이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으며 행복을 뒤로 미루는 게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의사로 별일 없이 지내던 하늘과 정우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nothing의 상태에 놓인다.
“근데 이게 뭐냐, 실컷 일하고 얻은 게 우울증이라니.”
일등을 놓쳐본 적 없는 하늘은 교수의 근본 없는 갑질에 하루에 17시간씩 일을 해도 죄인이,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 결과 얻은 게 우울증이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니, 이 또한 하늘이 부족한 탓이라고 한다. 하늘은 비로소 자신이 아프면서까지 지켜야 될 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병원을 나오지만 세상은 그런 하늘을 마냥 응원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조금 더 참지, 조금 더 버티지. 공든 탑을 한 번에 무너트렸다고 말한다. 외모, 실력 모든 부분에서 인정받던 스타 성형외과 의사가 된 정우는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수백억의 의료소송에 휘말렸고,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고는 정우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 같다.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친구들도 그를 욕하며 떠났다. 돈과 명예를 잃은 정우는 이제 더 이상 주류가 아니다. 정우가, 하늘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던 상관없이 지금 그들은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밀려났다. 한순간에, 허무하게도. 이런 심리적인 낙심이 우리 주위에 차고 넘친다.
정우가 하늘의 옥탑으로 이사를 오면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어나는 지침의 흔적을 본다. 재개하기 위해 애쓰고, 이를 악물고, 경쟁하듯 행복을 차지하려 하기보다 두 사람은 함께 견디기로 한다. 울적한 오늘, 누구랑 이야기하고 싶은 밤, 함께 술을 마시고 벚꽃 잎이 흘러넘치는 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다음날 흑역사로 박제되었지만, 그날의 온기가 삶에 남아있어 어려운 순간을 지나갈 수 있었다.
어느 날에는 함께 떡볶이를 먹고 오락실을 가고, 불면증에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고스톱을 치며 불행을 흘려보냈다. 거창한 위로를 기대했던 하늘은 오히려 이런 평범한 순간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 행복이야 말로 거창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한 위로로써 곁에 함께 있는다. 박준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서로를 통해 알게 되었을지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 ‘고아’-
이제 시작하는 이야기의 나중이 기대되는 건 ‘작은 일은 담담하게 흘려보내는 습관. 그리고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삶. 그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어디쯤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 맨슨이 쓴 [신경 끄기의 기술] 또한 주변에서 휘둘러대는, 그런 작은 일에는 이만 신경을 끄라고 한다. 행복마저도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돌릴 때 내가 진짜로 신경 써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많은 것들은 작은 일이 되는 것 같다. 말처럼 쉽지 않기에 나는 이 일을 언제부턴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행복도 마음에 와닿았다. 드라마가 추구하는 행복은 ‘적당한’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나에게 알맞은 수준 ‘적당한’
어떻게 쓰는 줄도 모르면서 행복도 경쟁하듯 많이 가지려 하고, 극복해야 할 일처럼 풀어내는 시선에 지쳐가던 참이다. 진부하게 느껴지더라도, 스트레스받을 땐 떡볶이 아니면 단것! 을 찾는 것처럼 드라마는 ‘적당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요소로 이뤄져 있음을 두 사람이 매일의 삶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통해 보여준다.
자신에게 알맞은 행복을 경험하는 과정을 시청자로서 보는 것도 ‘함께’ 하는 형태가 된다면, 저들과 함께 나의 삶에서도 드라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갈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발견하고 싶어졌다.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