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F호소인의 변명
요즘은 어딜 가나 MBTI로 자기소개를 한다. 직장에서 만나든 사석에서 만나든 상대를 빠르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MBTI를 활용한다. 간혹 MBTI를 혈액형, 띠와 비슷한 류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MBTI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MBTI는 내 성향을 묻는 여러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을 요약한 결과물로, '나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의한다'는 주장은 타당할 수 있어도 '내 성향과 전혀 무관해, 미신이야'라고 답할 수는 없다. (설문에 답한 건 누구죠 그럼?) 물론, 동일한 MBTI를 가진 사람이더라도 성격은 제각각이다. MBTI는 어디까지나 '성향'에 대한 조사일 뿐 성격에 대한 조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MBTI를 맹신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기 좋은 지표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MBTI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 MBTI는 ENFJ인데 나무위키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도자, 언변능숙형
온화하고 적극적이며 책임감이 강하다. 사교성이 풍부하고 동정심이 많다. 상당히 이타적이고 민첩하고 사람 간의 화합을 중요시하며, 참을성이 많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대체로 동의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추구하며, 편안하고 능수능란하게 계획을 제시하고 집단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다. 전 세계 인구의 2.5% 정도로 희귀한 유형이며, 대한민국에서도 3.5% 미만으로 보기 드문 유형이다.
겉보기 특성 - 모임을 좋아하며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면에서는 ENTJ와 다소 비슷하다. 하지만 F형(감정형)이라서 타인의 반응에 대해서 더 예민하고, 싫은 소리는 되도록 하지 않는다.
사회인격학의 쿼드라 그룹 모형으로는 Beta 그룹에 속한다. 해당 접근 방법에 의하면 MBTI식 기준으로 ISTP, ESTP, INFJ인 사람과 집단을 형성했을 때 가장 큰 심리적 편안함을 느낀다. 사회인격학의 갈등 관계(Conflict, Conflicting Relations) 분석에서, 가장 상극인 MBTI 유형은 ISTJ(MBTI식 지표)이다.
내 MBTI는 나를 제법 잘 대변한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달까. 근데 내 MBTI를 이야기하면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작자들이 존재한다. 바로 회사 친구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직장 동기'인데, 나와 함께 고시공부를 했거나, 연수원에서 같이 교육받았거나, 같은 부처에 있거나 하면서 친해진 이들로 모두 사무관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직장 밖의, 또는 행정고시의 때(?)가 묻기 전의 나를 본 적은 없다.
"F라고 말하면 착해 보일 줄 알았어? 너는 딱 봐도 T야"
"또 F호소한다 또! 또!"
특히 이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포인트는 바로 내가 'F' 성향이라는 점인데, 이들은 나에게 'F 호소인'이라는 그럴싸한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참나. 난 사실 감성적이고 낭만을 추구하는 편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매일 공부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딱딱한 회사 일이나 이야기해서 그런가 싶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F답게) 잃어버린 낭만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향기에 민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아이팟에 2,900곡에 달하는 음악과 콘서트 영상을 가득 채워 들었고, BOSE 헤드셋을 끼고 야자시간인지 청음시간인지 모를 저녁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합격 후 가장 먼저 간 곳은 실용음악 학원이었다. 그곳에서 기타와 드럼을 동시에 배우기 시작했다. 새 학기에는 밴드와 작곡동아리, 클래식기타 동아리에 동시에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작곡 동아리와 클래식 동아리는 차분한 분위기가 무서워 금방 도망쳤다) 이 정도면 음대에 진학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다.
짙은 숲내음이 나는 아침 등굣길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감성적이거나 몽환적인 밴드음악과 함께 백양로를 거닐었다. 고등학교 내내 들었던 락과 메탈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백양로가 너무 예뻐서였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좋은 계절을 마음껏 즐기고 (물론 시험기간엔 도서관에서 날밤도 새고 했지만) 친구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 이런 내가 어쩌다 F 호소인이라는 말이나 듣게 된 걸까? 모든 잘못은 회사에게 있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 혁명을 겪으며 인류의 불행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사냥 한 번으로 일주일간 먹고 자던 시절을 지나, 해 떠있는 시간에는 종일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삶이 시작되면서 오늘날 9 to 6 노동의 개념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는 만큼, 회사에서의 삶이 우리에게(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문제는 회사에서는 도저히 F의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너와 나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만 생각할 뿐이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감정을 헤아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임에도, 이해하는 순간 업무가 내게로 넘어온다는 생각에 애써 외면한다. 아프든 말든, 애가 있든 없든, 휴가든 아니든, 그건 모르겠고 일은 해야지? 하는 사람이 회사엔 너무도 많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가 내 사정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생겨난 변화다. 급히 자료를 요구해야 하는데 부재중인 경우에는 상대의 사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내쉰다. 다른 이의 사정이 내게 부담으로 돌아오는 구조.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타인에게 공감할 수가 없다. 낭만과 감성은 비효율을 낳을 뿐이다. 회사에서는 우리 모두 (실제로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극한의 효율충이 된다.
지난 월요일, 월-화 이틀간의 휴가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노트북'관련 지난 글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하루 더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돌아와서 집청소나 하고 숙박비도 아끼는 편이 낫겠다는 심산에서였다.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출근하자마자 후회했다. 휴가마저도 효율을 따지며 다녀오다니 내가 미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죈종일 효율만 따지다 못해 내 삶에도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밀기 시작하다니.
보상심리로 충동적으로 향수를 구입했다. 몇 년간 비싸서 망설였던 제품이다. 효율충이 되어버린 내 모습이 너무 싫어 갓 도착한 향수를 꺼내 살충제를 뿌리듯 몸에 뿌렸다. 요즘 들어 삶에는 어느 정도의 비효율이 허락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효율만을 추구하는 삶 속에는 낭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느껴서다.
앞으로는 눈앞의 목표만을 향해 잰걸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주변을 둘러보며 여유를 갖는 삶을 살고자 한다. 최근 절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바를 부쩍 자주 찾고 있는데 (친구가 사장님이면 술값이 아깝지 않다. 문제는 친구가 술값을 잘 안 받는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 들어 좋다.
효율성이 만능인 시대에 비효율을 추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 입 밖으로 말이라도 꺼냈다가는 낭만 넘친다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말은 꺼냈지만 당장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회사에는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폐급 취급받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