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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n 16. 2023

백령도 표류기2

둘째 날

  아침 여섯 시에 맞추어 놓은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다섯 시 반이었다.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늘 일어나는 그 시각에 잠이 깬 것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층 숙소 창문을 열자 내가 어디쯤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짙은 안개가 온 사방을 뒤덮고, 밤새 내리던 비는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인천 가는 배가 왜 취소되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창문을 닫았다.

  어젯밤 숙소를 배정받고 호실에 들어오자 방안은 전기온돌과 온풍기로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방바닥에 요를 깔고 TV를 켜고는 방벽에 기대 비스듬히 누웠다.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 숙소는 세 명이 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건넛방에 누워 TV를 보던 친구의 코 고는 소리가 열어 놓은 방문을 타고 들려왔다. 얼른 방문을 닫았다. 코 고는 소리가 TV 소리보다 작게 들리나 싶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거실에서 자기로 한 친구가 이부자리를 깔면서 건넛방 문도 닫은 게 분명했다. 백령도에서 맞은 첫날밤은 사내들의 코 고는 소리에서 벗어나 편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애초 오후 1시 30분에 백령도를 떠나기로 한 일정에서 하루가 늘어났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두 여유로웠다. 첫날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서 아침으로 미역국을 먹고 난 후, 시계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느긋하게 버스에 올랐다. 해가 오르기 시작하면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게 보통인데 이곳은 달랐다. 계절 탓인지, 지형 탓인지 비가 그쳤는데도 안개는 더 짙어졌다. 바다에서 소리 없이 밀려오는 바다 안개였다.

  안개가 끼고, 기온이 하루 사이에 십여 도 이상 내려간 날씨 때문에 몸은 움츠러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찬 공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비 오는 늦가을 날씨 같았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온 친구에게 자기 우의를 껴입으라며 건네는 다른 친구의 말이 들려왔다. 숙소에서 나올 때 난 바람막이를 속에 입고 그 위에 점퍼를 입었다. 봄에 가는 1박 2일 여행이라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챙겨 온 바람막이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김반장은 어제 보지 못한 백령도 곳곳을 둘러보고, 점심 식사 후 특산물 판매점을 들르는 것이 자기가 맡은 오늘 일정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시간은 우리가 알아서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관광 분위기를 내기 위함인지 귀에 익은 트로트 가요가 흘러나왔다. 내가 가이드였다면 안개가 자욱한 이런 날에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 틀었을 것이다.

  영화‘헤어질 결심’의 장면과 정훈희의 ‘안개’가 떠 올랐다. 안개가 뒤덮은 백령도에서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바다의 모습을 보게 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게 될지 궁금했다. 차창을 지나쳐 가는 안개 무리를 보면서 어느새 나는 안개를 읊조리고 있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중략)--

안갯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중략)--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백령도는 생각보다 큰 섬으로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큰 섬이었다.

현재 백령대교가 있는 화동과 사곶 사이 간석지를 막아 메꾸어 면적이 여덟 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인구는 현재 5,000여 명의 주민과 그보다 조금 많은 군인까지 포함하여 약 12,000명 정도가 산다고 한다. 백령도란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구려 때에는 곡도(鵠島), 즉 따오기 섬이라 불렀고, 고려 태조 때 백령진(白翎津)이 된 이후부터 백령도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백령도를 찾은 여행자 수는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백령도를 떠나 인천 연안부두에 발을 내디딜 때까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몸으로 절절히 느꼈다.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섬에 잡혀 있는 것 자체가 선택받은 자의 축복이라고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빨강 버스에는 까나리 여행사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동안 많은 여행사를 봤지만, 생선 이름을 상호로 쓰는 여행사는 처음이었다. 멸치여행사, 밴댕이여행사, 새우여행사라고 생선 이름을 여행사 앞에 머릿속으로 붙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백령도에서 나는 특산물이 까나리 외에 미역, 다시마도 있는데, 입에 짝짝 달라붙는 단어가 까나리라서 정한 듯했다. 처음엔 여행사 이름이 어색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감이 갔다. 안갯속을 헤집고 우리를 곳곳에 데려다 놓는 빨강 까나리 버스가 예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 오후에 왔던 두무진 주자창에 도착했다. 전망대에 들러서 아래 해변까지 다녀오는 코스이었다. 열여섯 명 중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꼬리를 물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든 손이 차가운 안개 때문에 시려왔다. 먼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유람선에서 보았던 풍경이 안개 너머로 뿌옇게 펼쳐졌다. 바다와 하늘이 온통 회색빛에 물들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친구 중 일부는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책길도 미끄럽고, 절경이 안개에 가려 보기도 어려운 데 굳이 힘들게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두무진 포구로 발길을 돌렸다. 포구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들어갔다. 난방을 틀어 놓아 따뜻했다. 김반장과 아는 사이인 듯한 중년 여성이 백령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날씨가 좋지 않은 이런 날엔 힘들게 구경하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과 노닥거리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에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친구들 모습이 보였다.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지나치는 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백령도엔 신호등이 없다고 깁반장은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인 양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일 13:30분 출항하는 배를 오전에 할 일도 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아침 7시 첫배로 바꿔 이곳을 빨리 떠나자는 의견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예상한 대로 김반장은 시간 변경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운 배편을 자기가 힘을 써서 해결했다고 떠들어 댔다. 우리가 타고 갈 배가 ‘코리아프린세스’호로 바뀌었다.

  두무진을 떠난 버스는 십여 분을 달려 백령기독교 역사관이 있는 중화동 교회 마당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위로 난 돌계단을 오르자 아담한 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1898년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기독교 100년 역사를 볼 수 있는 역사관에 들어갔다.

  백령도의 기독교 역사는 깊었다. 1832년 동인도회사 무역선을 타고 온 동아시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가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관문이 된 곳이 백령도였다. 백령도에는 서울 새문안교회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중화동교회를 비롯하여 100년 넘는 교회가 셋이나 있다.

   몇 해 전까지 내가 살았던 강화도 집 옆에 있는 100년이 넘는 망월교회가 떠 올랐다. 서해에 있고 황해도 피난민이 많이 사는 섬, 100년 이상 오래된 교회가 있으며 기독교인이 섬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까지 이곳과 강화도는 닮았다. 백령도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03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백령도 들어올 때 예상했던 현장 실사를 나온다는 전화였다. 금요일 오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한 내 말에 담당자는 놀러 간 거냐고 되물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 말에 뜨끔했다. 비즈니스로 백령도에 들어왔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담당자는 금요일에 다시 전화하고 일정을 잡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목요일인 내일은 배가 출항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나님께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빌었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안개가 낀 다음 날엔 맑게 개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내일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금요일인 모레는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있는 콩돌해변에 들렀다. 볼 것이라곤 콩같이 생긴 돌밖에 없었다. 콩돌해변은 이름 그대로 콩처럼 작고 예쁜 자갈들이 깔린 해변이었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을 가진 돌들은 반질반질했다. 규암과 사암, 현무암 등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해 부서진 후 마모를 거듭해 아주 작고 둥근 모양이 되었다. 약 1㎞가량 남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무단 채취나 반출이 금지되어 있다. 천연기념물이면 뭐 하나 바다도 해변 풍경도 안개에 가려 감상할 수 없었다. 콩알만 한 돌 하나 갖고 가다 걸리면 벌금이 몇천만 원이라고 하면서 발가락 사이에 끼워 나가면 된다고 김반장은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안개가 차지해 버린 바닷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닥에 깔린 돌 뿐이었다.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버스로 돌아온 우리를 어제 그냥 지나친 백령대교 앞 광장에 풀어놓았다. 김반장은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고 좁은 대교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서해최북단백령도’라는 비석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여행사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마지막 식사는 메밀 칼국수였다. 백령도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라고 하지만, 칼국수를 먹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평소에 돈 주고는 먹지 않는 것이 칼국수라서 차라리 냉면이 먹고 싶었다. 김반장 이야기로는 사곳에 있는 유명한 냉면집이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맛이 예전 같지 않아 지금은 거의 손님이 없다고 했다. 십여 년 전 맛있게 먹은 냉면집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관광객이 줄면서 어려진 진 게 아닌지, 아니면 여행사에 미운털이 박혀 그런 소문이 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칼국수 외에 다른 메뉴가 있으면 먹은 면 된다는 생각으로 따라 들어갔다. 면은 거무튀튀하고 국물은 싱거운 듯 심심했다. 입에 넣으면 힘없이 끊어져 버리는 면발이 육수와 어울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면발과 국물이 일반 밀가루 칼국수와 달라 색다른 맛을 내는 것이었다. 추가로 시킨 김치 부꾸미, 여기선 ‘짠지떡’이라고 하는데 내 입맛에 맞았다. 점심이었으니 망정이지 저녁이었다면 다른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사곶 해변을 향해 마을 길을 따라 삼삼오오 걸었다. 마을 안쪽에 있는 거대한 안테나가 보였다. 예전에 인천과 백령도를 이어준 통신용 안테나였다. 마을 남쪽 해안 쪽으로 해송 숲이 길게 펼쳐있다. 인솔하는 사람도 안내하는 사람도 없이 자석에 끌리듯 해변으로 들어갔다.

  전 세계 두 곳밖에 없다는 천연 해변 활주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폭 300m, 길이 3㎞의 광활한 해변으로 단단한 규사토가 깔려있어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한 곳이었다.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됐고, 현재는 해변의 훼손을 막기 위해 차량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포탈에 있는 대부분 자료에는 6.25 때 미군이 활주로로 사용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1980년대에도 우리 군이 활주로로 사용하였다. 군 복무 시절 한 달에 두 번 C-54 수송기가 뜰 때마다 긴장했던 일, 사곶 해변 활주로 위치를 알려주는 항법 장비 태칸(TACAN)을 담당했던 일 등 사십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젠 비행기도 뜨지 못하고 차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해변으로 변해 버렸다. 백령대교가 있는 곳을 막아 담수호와 간척지를 만들자 바닷물 길이 바뀌어 생긴 환경변화였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간 곳은 용기포 해안 등대였다. 문 닫은 상점이 줄지어 있는 용기포 옛날 항구에서 뒤쪽 산으로 오르자 숨이 찰 때쯤 낡은 등대가 나타났다. 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등대는 과거엔 백령도 뱃길을 환하게 밝혔다. 등대에 오르는 계단에 앉아 단체 사진을 찍고는 내일 우리가 떠날 용기포 신항을 바라보며 발길을 돌렸다.

  버스는 숙소가 있는 진촌으로 향했다. 용기포 등대에 가는 길에 특산품 판매장에 들러야 했는데 주인이 부재중이라 지나친다고 했던 김반장은 자신이 문을 열고 물건을 파는 것을 주인에게 허락받았다고 매장 앞에 버스를 세웠다. 내일 집에 갖고 갈 특산물만 사면 모든 여행 일정이 끝나는 것이었다. 가게 문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능숙하게 열었다. 주인이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사실은 김반장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이드, 운전기사. 판매장 점원 등 1인 3역에다 마술사 일까지 하면서 빨강 까나리 버스의 차주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이 고향이고, 백령도와 인연이 있는 나에게 추천할 만한 특산물을 물었을 때, 다들 알고 있는 미역과 다시마 외에 반건조 우럭을 추천했다. 가끔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여 반건조 우럭과 미역, 다시마를 사서 먹곤 했다. 잠깐 들렀던 하오수 매장에서는 구경만 한 친구들은 내 추천 때문인지 한 보따리씩 물건을 골라 결제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나도 미역, 다시마, 반건조 우럭을 골라 들었다. 미역에 반건조 우럭을 넣고 끓인 미역국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미역국을 매우 좋아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칭찬받을 일이 생겨 흡족한 기분으로 특산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 커다란 냉장창고에 있으니 반건조 우럭은 거기에 이름을 써서 보관하면 된다고 김반장은 신이 나서 말하는 것이었다. 어제 이 시각쯤에 받았던 배의 출항이 연기되었다는 문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오늘이 백령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임이 분명했다.

  마지막 저녁 메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김반장도 딱히 추천할 만한 식당이 없다면서 아침 먹었던 식당의 아귀찜을 언급했다. 저녁은 아귀찜으로 정하고, 우리와 여행을 같이하고 있는 일본인과 부부도 함께 하기로 했다.

  아귀찜에 볶음밥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마지막 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운 밤이었다. 이런 기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회장단에서는 미리 노래방을 알아보고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두 방에 나뉘어 각자 알아서 들어갔다. 노래방에 언제 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술 한 잔에 노래 한 곡 부르는 게 우리가 놀던 문화 아니었던가. 코로나 팬더믹과 세월이 노는 문화까지 바꾸어 버렸다. 모두가 서너 곡은 거뜬히 불러젖히는 가수이면서 흥이 넘치는 관객이었다. 여기에 노래방까지 따라온 일본인 관광객까지 합세하여 노래방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십여 년 전 훈련받을 때 목청껏 불렀던 공군가를 마무리 곡으로 떼창을 했다. 백령도의 마지막 밤은 흥겨운 노랫소리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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