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때 성장한다. 무언갈 고르기 위해 고민하고 유추하는 과정에서 탐구력이 상승한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책임지는 자세를 배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한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로 우뚝선다는 의미와 같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을 세분화시켜 다듬은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이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적 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탐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또는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존 스튜어드 밀>
필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선택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단체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한국인들은 더더욱.
선택하는 행위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상대에게 미루는 경향이 있다. 하필이면 한국땅에서 이는 ‘양보’와 ‘배려’라는 미덕으로 풀이되곤하기 때문에 선택의 미룸은 합리성을 얻기도 한다.
허나, 이 양보의 자세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결국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 흐리멍덩하고 만만한 사람으로 각인된다. 제 점심메뉴 하나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의 인격을, 존엄성을 과연 누가 알아줄까.
최근 필자는 육아를 준비하며 많은 양의 육아서를 접하고 있다. 저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든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 역시 이와 상통한다.
아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화를 주되, 이에 대한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버릇을 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선택하지 못하고 남에게 선택을 미루는 것을 보며 자라난 아이들은 결국 그 자신 역시 주관이 흐리멍덩한, 어리바리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이 아이들은 결국 커서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호를 알아채지 못할 확률이 크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대등해보이는, 혹은 결과를 알 수 없기에 두려워보일 수 있는 갈림길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결과가 어떻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결과가 좋았다면 현명하게 잘 판단 내렸던 것이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현명함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