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직이 정규직 기회로 돌아오다
영국 취업 도전기
리크루터로부터 한 달짜리 임시직을 제안받았다.
기간 : 4주
보수 : 시간당 £12~£14
역할 : 사무 보조직(약간의 회계 지식 요망)
시작일 : 거의 바로(나중에 알고 보니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 있었다. 리크루터가 잘못 알려 줌.)
솔직히 이걸 지원하는 게 맞나 싶었다. 한 달짜리 임시직이라니. 사무직을 겸한 단순 업무라고 했다. 하지만 엑셀을 사용해야 해서 다소 회계 지식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리크루터는 내가 영국에서 회계직 경험이 없으니, 일단 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이에 동의했지만, 최소 6개월은 되는 임시직을 막연하게 기대했었다.
내가 일을 구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회계 쪽에도 여러 개의 직군이 있는데, 그 직군 중 어디가 나한테 맞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임시직을 통해 회계 업무를 경험해 보면서, 그런 직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또한 어디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중요하다. 영국 사무실에서 정규직으로 일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영국에서 동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그런 경험을 얻어 가는 게 중요했다. 임시직이지만, 4주간 매일 출근하며 회사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임시직, 지원해 볼게요."
리크루터 루크 또한 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어쨌든 한 줄이라도 영국 회계직 경험이 느는 건 플러스예요. 지영 씨가 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면접 자리를 계속 소개해 줄게요."
일을 구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뭐라도 회계직 경험을 쌓으면서, 일을 구하는 게 낫다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이런 결정을 한 이면에서는, 긴 겨울 동안 집에만 있고 싶지 않은 심리 또한 크게 작용했다.
영국의 겨울은 여러모로 지내기 힘들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햇빛 부족이다. 영국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해가 짧아지는데, 낮시간이 6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흐리고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아, 겨울 내내 햇빛을 거의 못 보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니 비타민 D 결핍은 자연스레 따라오고, 왜 영국 사람들이 우울증에 많이 걸리는지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집도 한국만큼 따뜻하지 않다. 거의 아파트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영국의 집은 정말이지 춥다. 영국 집은 열심히 난방을 해도, 그다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전기, 가스세가 염려되어 아껴 쓰는 것도 사실이다. 절약과 풍족의 중간쯤에 기준 온도점을 잡고 지내는데, 집에서도 두껍게 옷을 입고 있지만 늘 손발은 냉랭하다. 움직이면 좀 괜찮지만, 이래저래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차가워지는 손과 발을 피하기 쉽지 않다.
이런 이유 이외에도, 일을 하게 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우선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생길 테고, 영국 사회를 좀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될 테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고 내 안의 의견을 조율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는 몰랐던,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의 자극들이 그리웠다.
물론 일을 하게 되면 또 그만두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안다. 집에서 여유롭게 보내던 시간들, 매 식사 메뉴를 궁리하던, 이 자유를 그리워하리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임시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금요일로, 곧 인터뷰가 잡혔다.
좀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했지만, 역시 인터뷰가 시작되자 긴장감과 절박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를 인터뷰한 베브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질문에 답하는 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에 대해 좀 얘기해 줄래요?
"왜 이렇게 Volunteering을 오랜 기간 했죠?"
"왜 이 포지션에 지원을 했죠?"
"매니저와 어떤 관계를 갖고 싶나요?"
"회계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자격증을 가지고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어떤 건가요?"
"혹시 마지막으로 답변 이외에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두어 가지는 예상 못했던 질문이라 답이 턱 막혔다. 어물어물 다소 설득력 없는 답변이 된 듯했다. 그래도 진중하게 경청해 주는 베브 덕분에 훈훈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곧 연락을 주겠다던 루크가 연락이 없었다. 이건 좋은 신호인가, 나쁜 신호인가. 주말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다.
월요일, 평소처럼 요리 수업을 받기 위해 컬리지로 향했다. 컬리지는 이래저래 통신망을 차단해 놓아, 일반 전화도 안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오후가 돼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오전 일찍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전화가 안 터져 그 알림 문자마저 오후에 수신된 것이었다. 부랴부랴 문자를 보냈으나, 나중에 보니 그나마도 송신이 안 되었다.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루크에게 전화를 했으나, 이번에는 루크가 받지 않았다. 곧 문자가 왔다.
'조금 있다가 전화 줘도 될까요?'
그렇게 다시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렸을까. 드디어 전화가 왔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그 임시직 자리는 안 됐어요. 그런데 베브가 당신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어요. 회계 부서에 Credit & Sales Ledger Controller 정규직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당신을 추천했어요. 경력이 없다는 거 회사 쪽에도 알고 있어서, 되면 트레이닝해 줄 거예요."
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인터뷰가 나에게 또 다른 인터뷰 기회를 주다니. 그것도 회계 부서의 정규직 자리를. 나도 모르게 얼뜨게 '오케이, 오케이' 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 들뜬 목소리에 루크가 엄중히 말했다.
"아직 회계 부서 매니저와의 면접이 남았어요. 회계 부서 매니저 마음에도 들어야 성사가 됩니다. 그래도 이건 좋은 소식이에요. 회계직에 정규직이라는 더 좋은 포지션으로 기회가 돌아왔으니까요."
나는 뛸 듯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