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눈이 많이 오던 날, 칼리지에서 처음으로 시험 감독을 했다. 6월, 영국에서는 전국적으로 GCSE(학생들이 10,11학년, 두 해에 걸쳐 공부한 7~12개 과목들의 시험. 그중에는 수학과 영어가 포함된다) 가 행해지는데, 그 모의시험 중의 하나였다.
오전 8시 30분. 시험 감독을 위해 모이는 장소로 향했다. 난 '대기 시험 감독자' 명단에 있었다. 시험 감독자 수가 부족할 경우, 대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 대기 시험 감독자 명단에 있어 왔는데요."
"아, 잘 왔어요, 마침 두 명이 아파서 못 온다고 연락을 받은 참이거든."
대기 시험 감독자라, 어쩌면 시험 감독을 보지 않겠다 싶었는데. 아직 독감이 유행이어서 그런지, 역시나 결원이 있었다.
지시받은 시험 감독 교실로 향했다. 교실 앞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 조안 챕먼이군요!!"
회계 부서 업무상, 칼리지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게 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메시지를 날리는 게 처음엔 겸연쩍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다 보면 몇몇 이름들이 눈에 익는다. 그리고 괜히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조안은 그런 이름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얼굴을 마주하게 되다니! 몹시 반가웠다(아마도 나 혼자만). 조안은 칼리지에서만 25년을 근무했다고 했다. 칼리지에서 일하다 보면, 이처럼 장기로 근무한 사람들과 종종 부딪힌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곧 시험 시작 시간이 되었다.
교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을 입장시켰다. 총 4명. 내가 시험 지시 사항을 학생들에게 읽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지시 사항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는데,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시험 감독자 대상으로 한 지시문까지 읽어버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으면 (교과서가 필요한 시험인 경우, 덧붙여라: 교과서를 지참한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교과서만 책상 위에 두고 사용해야 한다.), : 뒤에만 읽으면 되는데, 앞 문장까지 굳이 줄줄이 읽어버린 것이다. ㅜㅜ
민망함은 내 몫이었다. 시험은 내 부끄러움에 아랑곳없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험 시작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험 직전에 물병을 원샷 하더라니. 화장실 안 가고 싶은 게 이상하다.'
영국은 시험 도중에도, 학생들이 원하면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이런 경우, 화장실 담당 직원을 호출해 학생과 동행하게 한다. 시험 감독은 두 명이라 할지라도, 각자 역할이 있으면 시험 장소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험에 필요한 도구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내가 시험 감독한 과목은 수학이었는데, 필기구를 비롯해, 컴퍼스, 각도기 등을 제공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이 정도는 기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시험 보다가 화장실에 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기본 시험 도구도 반드시 챙겨야 했다. 간혹 선생님께 빌리는 게 가능하더라고 꾸중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시험 직전에 도착한 한 여학생은 정말이지 거의 빈손으로 시험장에 들어왔다. 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다. 연필만 가져왔다고 조안이 말했던가.
어쨌든 시험 도구는 빌렸지만, 그 여학생은 시험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나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시험에 조금 집중하는 듯싶다가도 곧 창밖을 쳐다보기가 일쑤였다. 시험 끝나기 20분쯤 남았을까. 이번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반면에 앞에 앉은 두 명은 열심히 시험지를 풀어 나갔다. 둘 다 여학생이었는데 한 명은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자른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시험 감독한 경우도 학생들의 숫자가 적었지만, 다른 직원의 경우, 일대일로 시험 감독한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이 난독증처럼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시험을 보기 힘든 사유가 있으면 이를 보조해 준다고 했다. 예를 들어 난독증이 있는 학생에게는 노란색 시험지가 제공된다. 아이에게 신체적 불편함이 있으면, 이를 도와줄 보조 교사가 시험을 같이 보기도 한다.
오전 9시 반에 시작한 수학 모의시험은 11시에 끝났다. 학생들이 시험 문제를 시간 안에 다 풀지 못했을 경우, 23분을 추가로 준다. 하지만 4명 다 11시 즈음에는 시험장을 빠져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을 시작할 즈음 내리기 시작한 눈이, 시험을 끝낼 즈음에는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칼리지는 결국 칼리지 문을 닫는다고 공지했다. 시험을 끝낸 학생들은 우르르 바쁘게 칼리지 건물을 빠져나갔다.
'언제 시험 감독하게 되나 했는데, 어영부영 이렇게 했네.'
칼리지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되어가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