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노트 18
오랜만입니다! 매달 한번은 글을 남겨왔는데 9월에는 여의치가 않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상담실에서, 회사에서, 일상에서,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메모를 남겨왔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자살위기상담 이후에 상담자가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상담운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자살위기상담 훈련에서 위기 이후에 대해서는 참고할만한 자료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1. 비밀보장 훼손에 대해 다루기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자타해 위험이 높아 비밀보장 예외상황에 해당하여 비밀보장이 깨진 경우일텐데요. 비밀보장이 깨지면, 상담관계, 내담자, 상담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상담자로서 상상해보면 참 긴장되는 일입니다. 내담자를 배반했다는 느낌, 나를 탓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미안함 등 복잡한 감정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내담자는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리고 싶지 않았던 대상에게 알려졌다는 분노, 수치심, 상담자에 대한 배신감도 일어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상담관계는 당연히 거친 풍랑 속에 위태롭게 떠있거나 가라앉고 있게 되고요.
여기까지 내적인 경험들을 상상해보았는데 실제 상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담자는 상담자에 대해 양가감정, 상담에 대한 회의를 품으면서 상담실에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도 고맙게도 상담실에 돌아왔다면, 일어난 일에 대해 충분히 개방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없던 일처럼 지나갈 수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내담자는 무얼 경험했는지, 그 혼란스러움, 괴로움을 일단 먼저 다루어서, 그 상황을 떨어져서 살펴봅니다. 그리고 나면, 결국 비밀보장이 깨어져서 제3자의 개입이 있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다시 만나는 사이에 어떤 마음들이 있었고, 지금 앉아있는 이 순간에는 어떤 마음인지도 나누어봅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상담자도 자신의 내적 경험을 솔직하게 개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므로, 그러나 연약함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관계가 안전하다는 의미이고, 서로를 존중하고 위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상담자는 내담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내담자에게는 죽음이 삶보다 더 유용하다고 믿어졌고, 삶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설득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어려울 때에는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내담자를 보호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을 지연시킬 수 있는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어요. 삶이 무겁고 괴로워서, 다르게 살고 싶은데 그것이 어렵다고 믿어져서, 죽음 밖에 방법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2. 자살 위험을 지속적으로 평정하기
개인의 자살위험은 계속 변화하고, 치료계획도 계속 조정됩니다. 그러려면 자살위험 요인, 보호 요인을 상담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행동관찰과 통합하여, 위험도를 평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기상황이 지난 후에, 다시 상담에 돌아왔다면 증상, 약물치료 순응도, 자원, 위험신호 등을 다시 지속적으로 평정합니다. 위험도를 주로 상/중/하로 임의적으로 구분하는데, 그 위험도에 따라 상담자의 치료계획과 개입 선택은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3. 자살위험도가 일단 낮아졌다면, 설득하느라 논쟁에 휘말리지 않기
자살사고가 자아동질적이어서, 즉 자살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그편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확신할 때에는, 그것에 대해 논쟁하며 설득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득은 위험도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위험도가 가라앉았다는 가정하에, 자살사고에 대한 논쟁은 대개 소모적이고 내담자의 공고한 논리를 깨기가 어렵고, 내담자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딜레마에 놓이게 됩니다.
내담자가 자살위험도가 높지 않아 혼란스러움, 충동성이라는 증상이 가라앉았다면 이제는 내담자에게 이미 내재되어있는 잠재력으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담자의 위기상황에는 내담자의 자율성을 일부 침해하고 라포가 훼손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적극적인 설득과 개입이 필요하지만, 위기상황에서 일단 빠져나왔다면, 위험도 평정을 하면서 그것이 확인되었다면, 내담자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다시 믿어야 합니다. 상담자의 불안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여전히 내담자를 설득하고 논쟁하는데 빠져 진전은 없고 라포는 더 무너져가게 됩니다.
상담자는 자신의 불안을 알아차리고, 훈련받은 상담자로서 해왔던 경험들을 믿고, 내담자 이해에 따라 필요한 개입을 단단하게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해왔던 작업들로 빠르게 돌아가기보다는, 지금 남아있는 증상들을 먼저 다루는 게 좋겠습니다. 무력감, 공황, 불안 등 다양한 증상이 활성화되어 여전히 일상생활이 어렵고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주 동안' 내 상태에 이득이 되는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든지, 동기를 불어넣기 위해 상담 관계나 내담자가 아끼는 대상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활용해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담자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활용해서 내담자의 자괴감으로부터 물러나서 상담자의 탐색이든, 행동계획이든, 행동연습 등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혹은, 지금 내담자가 처해있는 모습을 내담자가 아끼는 대상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지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대개, 상담관계를 활용하는 방법이 좀 더 힘이 있고, 보호요인이 되는 대상에 대한 관점은 제한적으로 잠깐씩 환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4. 신체를 활용하기
위기 상황에서 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틈틈이 신체를 활용해서 지금여기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가이드하는 부분입니다. 다미주이론과 Somatic Experiencing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언어적 상담의 한계에서 상담자로서 막막함을 크게 느꼈을 것 같아요. 신체를 활용하면 상담자로서 개입범위가 넓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뭐가 보이는지, 지금 숨소리가 가쁜데 숨을 천천히 쉬어볼 수 있는지, 숨소리가 안들리는데 좀 더 크게 숨을 쉬어볼 수 있는지, 가능하다면 등을 대고 서있거나 누워있을 수 있는지. 위기상황 이후에도 마찬가지겠죠. 여전히 무력감, 공황 등의 증상이 악화된 상태라면, 약물순응도를 체크하고, 상담 회기 내에서 호흡이나 자세 등을 트래킹하여 비춰주고, 필요하다면 신체를 조절하거나 감각에 노출하는 개입도 진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