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각본을 멈추는 힘:
담아내기와 공감적 직면

상담노트 36

by 단팥크림빵

전염되는 무력감: 투사적 동일시와 담아내기

상담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상담자는 때로 거친 폭풍을 만납니다. 특히 내담자가 뿌리 깊은 수치심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파괴적으로 깎아내릴 때, 상담자는 마치 늪에 빠진 듯한 강렬한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이는 단순히 내담자의 한탄을 듣는 일이 아닙니다. 내담자가 도저히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상담자의 내면으로 밀어 넣어, 상담자로 하여금 자신과 똑같은 절망과 마비감을 느끼게 만드는 '투사적 동일시'의 과정입니다. 이때 상담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비온(Bion)이 강조한 '담아내기(Containment)'입니다. 내담자가 쏟아낸 정체 모를 공포와 수치심을 상담자의 내면에서 느끼는 동시에 관찰하는 식으로 버텨내고, 그것을 관찰과 사유가 가능한 '언어'의 형태로 돌려줍니다.


소화와 직면: 날것의 감정을 영향력으로 재정의하기

상담자가 이 투사물을 그대로 삼키거나 튕겨내지 않고 안전하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세심한 단계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먼저, 상담자는 "당신이 자신을 그토록 수치스럽다고 말씀하실 때, 제 마음도 벼랑 끝에 선 듯 숨이 막히고 무력해집니다"와 같은 '나-전달법'을 사용합니다. 이는 상담자의 감정을 데이터 삼아, 내담자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돕는 과정입니다. 이어지는 단계에서 상담자는 이 강렬한 호소를 "당신은 짧은 시간 안에 저를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큰 힘을 가지셨군요"라며 '영향력'으로 재정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막막함이 과거 어느 지점에서 느꼈던 결핍이나 상처의 재연은 아닌지 연결함으로써, 내담자가 현재의 반응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방어의 타당화: 수치심이라는 안전한 도피처와 작별하기

만약 내담자가 이 직면을 거부하며 다시 수치심 뒤로 숨어버린다면, 대인과정 접근의 테이버(Teyber)의 조언대로 그 부정하는 현상 자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보세요, 제가 당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자마자 당신은 얼른 다시 '못난 사람'의 자리로 되돌아가시네요.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려야만 저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지금 저를 밀어내고 계신 건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내담자가 수치심을 유지함으로써 얻는 심리적 이득, 즉 상담자와의 진실한 접촉을 차단하고 자신을 고립된 안전지대에 두려는 방어 기제를 지금-여기에서 짚어주는 과정입니다.


나아가 상담자는 그 수치심이 내담자를 지켜온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음을 타당화해주어야 합니다. 대상관계 임상가인 캐쉬단(Sheldon Cashdan) 또한 비온과 마찬가지로 상담자가 느끼는 역전이 감정을 치료의 핵심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는 내담자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난 당신이 불쌍하다"며 자신을 비하할 때 그 이면의 숨겨진 힘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깎아내는 수동성은 타인의 비난이나 개입을 원천 봉쇄하여 자신을 지키려는 강력한 방어이자 통제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 수치심은 어쩌면 가장 안전한 도피처인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당신에게 감당하기 힘든 기대를 하거나, 더 크게 실망할까 봐 두려우신 것 같네요. 당신이 자신을 깎아내는 순간 저는 무력해집니다. 혹시 제가 당신의 삶에 개입하지 못하게 막고 계신 건가요?"라고 정중히 물어야 합니다. 비온이 날것의 감정을 '소화'했다면, 캐쉬단은 그 감정의 '기능'을 짚어줌으로써 내담자의 언어로 말해지지 못하는 에너지를 건설적인 자각으로 바꾸도록 돕습니다.


공감적 직면: 행동에서 사유로의 전환

이 과정의 핵심은 결국 비온과 캐쉬단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행동에서 사유로의 전환'에 있습니다. 수치심이 밀려올 때마다 즉각적인 자기비하나 무력한 호소로만을 반복하는 내담자에게, 상담자는 그것을 '말'로 바꾸어 돌려줍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반복되면 '충동 → 행동' 회로가 '충동 → 언어 → 사고 → 행동'의 회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내담자가 "난 불쌍한 존재니 나를 포기하라"고 행동으로 외칠 때, 상담자는 포기하거나 달래는 식의 각본을 반복하기보다 "당신은 주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상담자가 내담자의 정체 모를 고통을 '명명(Naming)'하여 반환하는 행위는, 관계 속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치료적 변화는 상담자가 억지로 닫힌 문을 열려 하기보다 "당신이 지금 문을 꽉 잠그고 있네요"라는 명명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담자는 비로소 비극적 각본을 반복하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통까지도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

관련 정신역동적 개념: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 (Projective Identification), 비온의 담아내기 (Containment), 캐쉬단의 기능적 직면 (Functional Confrontation), 테이버의 대인과정 (Interpersonal Process) & 방어의 타당화(Validating defense mechanism)

매거진의 이전글자살위기 상담에서 '유능함'의 재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