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라 Nov 24.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16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



내가 출근을 결심하기 전,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떠났다.

김해인 씨는 제주도 촬영을 자주 다니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서 살면 어떨까,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했다.

제주도에 살아도 김해인씨는 여전히 촬영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제주로 돌아오면서 ‘아~ 홈 마이 스위트홈~ '의 기분이겠지만,  고군분투 육아를 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몫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늘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미루고 딴 이야기로 넘어가곤 했다.

 나도 제주도를 참 사랑하긴 하지만 제주에서 사는 일은 너무나 현실인 것이다.


어는 날, 밥을 하다가 ‘우리는 오늘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로 더 많은 후회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뒷 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그 생각이 들고 두 달 후. 우리 가족은 자동차에 자전거와 커피머신, 냄비 우리 집 고양이 가족 깜콩이까지 짐을 꽉 채워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났다.

주변의 모두에게는 우리의 안식월, 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당시 우리는 제주로의 이주까지 단단히 생각하고 떠나는 길이었다.


완전히 떠나기 전에 한 번 살아보고 경험해 보자고.


그렇게 어제도 내일도 생각하지 않고 매일매일 딱 오늘 하루만 생각하는 제주도 안식월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비교적 공항에서 가까운 제주 동쪽의 조천에 집을 구했다. 자전거를 타고 대문을 나서면 금새 바다에 도착하는 그런 작은 집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주희는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동네의 초등학교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침마다 한라산을 바라보며 함께 등교를 했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첫째 주희를 학교에 내려주고 뒤뚱뒤뚱 뛰기 시작한 꼬맹이 둘째를 데리고 오름으로 바다로 놀러 나갔다.

육아는 그대로이지만 풍경이 달라지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tv도 장난감도 없이  마당이 있는 제주의 작은 집에서 아이들은 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났다.


날이 좋으면 다 함께 모여 마당에 빨래를 널고

텃밭에 바질도 심고 오일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휘휘 돌아다니고 ,제주도에서 나는 식재료들로 밥을 지어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날들을 보내며 소박한 삶이 주는 기쁨을 맘껏 누렸다.


우리 옆집엔 주희보다 한 살 많은 아이가 살았는데, 주희는 옆집 언니와 담벼락에 매달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동네 아이들은 어느새 나를 삼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는 어른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삼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리 불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행에서의 하루는 일 년과 같다고 하는데 제주에서의 매일매일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김해인 씨는 제주에 있는 동안은 긴 작품은 하지 않고 뮤직 비디오나 광고 같은 기간이 짧은 일을 했다.

우리의 조천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공항에 도착했다.

촬영을 위해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려 비행기를 기다리는 순간 김해인 씨는 새삼 가슴이 설레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을 경험하는 기분이라고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

가슴에 그 기억 하나를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제주 생활은 큰 의미가 있겠구나, 나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어느 아침, 김해인 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오늘 바로 들어가야 하는 촬영의 C 촬영감독을 급히 구하는데 오늘 바로 촬영에 합류할 수 있냐는 전화였다.

제법 규모가 큰 영화였고 드디어 기다리던 촬영 감독으로 입봉의 기회였다.

그 당시 아직 감독입봉을 못하고 촬영부 퍼스트였던 김해인 씨는 전화를 받고 한 참을 고민하다가 그 촬영은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제주도여서 촬영에 바로 투입되기는 쉽지 않고 준비 없이 입봉을 할 수는 없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제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이지만 역시 일을 제주도에서 원활하게 할 수는 없구나.. 경험으로 배우며 첫 번째 입봉의 기회를 놓쳤다.


사실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고 이야기할 만큼 잘 나가던 촬영부 퍼스트 김해인 씨는 이제 독립을 앞둔 수줍은 신인 촬영감독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다.

 그날 그 기회를 놓쳐서 더 힘들게 돌아간 것일까? 그 기회를 놓치고 다시 촬영감독의 기회가 오기까지,  김해인 씨의 고군분투는 옆에서 보고 있기 참으로 힘이 들고 고단했다.

그 시간은 무려 3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지옥의 3년이라고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한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가보지 않은 길은 늘 궁금하고 후회가 남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택한 길을 후회 없이 충실히 살아내는 것.

우리는 그날의 전화로 놓친 기회를 잡았다면 어떠했을까, 여전히 궁금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보낸 온전한 가족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았으니 말이다.



제주에 있는 동안 말 그대로 우리는 오늘만 생각하는 하루하루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건강도, 재산도, 직장도, 많은 것이 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의해 지배를 당할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의 추억은, 그리고 행복한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의 빛으로 남는다.

특히 유년의 행복한 기억들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순간에도 절대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준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다함께 제주에 가면 주희가 다녔던  학교를 찾아간다.

그 아름다운 한 시절을 깔깔깔 웃으며 이곳에서 마음껏 보냈던 아이의 유년 시절이 그립고도 부럽다.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안식월이 되었다.

봄과 초여름을 제주에서 보낸 우리는 서울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자동차에 자전거와 커피 머신, 고양이 깜콩이를 태워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우리는 맘껏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새삼 삶에 감사했다.

그리고 김해인 씨는  다시 중국으로 떠났고 나도 육아 10년 만에 다시  출근을 결심했다.




저녁밥을 먹고 산책이나 갈까, 집을 나서면 바다가 있던 꿈같던 시간








작가의 이전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