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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Nov 25.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17화.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 / 사회 공부




드라마 촬영을 한 참 하던 시기, 김해인 씨는 모방송국 드라마국 부장님과 함께 촬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분과 김해인 씨는 마음이 잘 맞아서 등산도 함께하고 기회만 되면 이런 저런 자리에 김해인 씨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경력직으로 방송국에 입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제안을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직장에 들어간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이런 삶도 또 있지 않을까,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김해인 씨는 방송국 경력직 시험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하다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방송국 신입 사원 지원 서류를 보고 처음에는 재미삼사 칸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해인 씨는 이름을 벗어나 첫 칸부터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맨날 내가 이름 석자를 빼면 확실한 것이 없는 사람, 이라고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했는데 정말 그랬던 것이다.

학위가 거창하지도 않았고 자격증이나 토익 점수도 없었고 흔히 말하는 스펙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십 년.

자신의 일을 좋아해서 몰두하며 열심히 걸어왔다.

꾸준히 크고 작은 성과를 내며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서류 한 장에 지금까지 삶을 잘못 살아온 것인가, 자괴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를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구나, 배신감마저 느껴진다고 말했다.

경력직 김해인은 봐줄만한 사람이지만 신입사원 김해인은 서류상으로 이 사회에 발을 비빌 곳조차 안보였다.

우리는 마흔이 넘어 사회공부를 다시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뛰어놀며 크는 게 최고! 를 외치던 김해인 씨는 아이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올 때 뭐든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 수 있는 스펙과 스토리를 든든하게 만들어 줘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 과정에서 내가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더니 김해인 씨는 그동안 어떻게 버텨내고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잘 아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한동안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조언보다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때였는데 내가 그걸 놓쳤구나! 아차 싶었다.

그 뒤로 나는 김해인 씨의 일에는 무조건 잘 해냈어, 대단해, 훌륭해, 끊임없이 말해주며 김해인 씨의 편이 되어준다.

세상에 무조건 내 편 하나쯤이 있다는 것이 든든함을 느껴주길 바라며.


고민들의 시간이 지나갔고 김해인 씨는 결국 방송국에 서류를 내지 않았다.

이제는 안정적이고 싶다, 생각하던 나는 내심 속으로 실망스러웠지만 단 한 번도 실망을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그리고 역시 너무나 김해인 씨 다운 결정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직접 지어 개명한 김해인 씨는 여전히 매순간 자신이 선택하는 길을 뒤도 안돌아보고 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런 김해인씨의 첫 번째 팬으로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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