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라 Nov 28.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18화. 우울증




사실 생각보다 많은 감독이나 촬영 조명 감독들은 공황장애나 우울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

언제나 남 앞에 결과물을 내놓고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평가를 받아야 하는 직업이라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는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은 ,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날라와서 시청률이 안 나오거나 평이 안 좋은 날에는 내 가슴이 다 쪼그라들 지경이고 가족들에게는 방송을 보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본인들은 얼마나 긴장이 되고 늘 살얼음 판일까..

김해인 씨는 그런 이유로 입봉을 앞둔 후배들에게 꼭 해주는 조언이 있다고 한다.

촬영감독의 첫 번째 무기는 실력보다는 뻔뻔함이다.

이십 년간 김해인 씨를 옆에서 관찰해 보니 그 말이 정말 맞다.


스무 살,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25년 차 베테랑 촬영인 김해인 씨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돌덩이같은 사람이다.

비록 괴팍하고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성격이지만, 돌덩이 같은 사람이기에 그러한 무거운 마음으로 현장을 20년 넘게 지켜왔겠구나.. 생각하면 직업인으로서 깨끗한 존경같은 그런 마음이 든다.

그렇게 단단한 김해인 씨에게는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며 중국 생활도 함께한 친한 동료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2022년 5월 4일, 스스로 생을 마감을 했다.

어린이날을 기념하며 미리 계획해 둔 캠핑을 위해 신나게 짐을 싸며 아이들이 하교를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중 부고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순간,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서 있던 한 명의 인간이 일순간 무너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

마치 진공 상태 같던 그 순간의 공기, 그 표정, 몸짓.

한 사람이 일생 쌓아 올린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공포.

김해인 씨는 그 형과 지난 작품을 함께 했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거라며 끝까지 설득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날 이후, 김해인 씨는 나날이 무너져 내렸다.

당연히 촬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촬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좋은 봄날, 난 돌아가신 분과 남은 가족의 슬픔을 애도할 틈도 없이 내 옆의 김해인 씨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중심을 잡는데 집중을 했다.

자다가도 김해인 씨가 살아있는지 확인을 해야 했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김해인 씨를 찾으러 꼬맹이 손을 잡고 동네를 하염없이 돌아다니기도 해야 했다.

가끔은 그 우울은 폭력으로 나타났고 때로는 엉엉 울면서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매일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밤에는 이제 그만 살고 싶다고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김해인씨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의미 따위 찾지 말고 우리 그냥 살자.

그 순간, 나는 우리 엄마가 나를 그냥 사랑했듯이 김해인씨를 그냥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거기에 더해서 그 무렵 우리 집 첫째 주희의 사춘기가  정점을 찍었다.

빅뱅보다 더 엄청난 폭발을 하는 사춘기 주희와, 자신의 세상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암흑으로 빨아 당기는 블랙홀 김해인 씨.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는 나의 작은 우주 막내 주원이가 있었다. 중심을 잡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제 나는 앞으로 다시는 혼자 제주도를 못 가겠구나, 모두 무사히 잠든 밤이면  그 걱정에 한숨이 푹 나왔다.


주먹을 꼭 쥔 채 늘 긴 창을 휘두르며 살아온 김해인 씨는 본인의 우울증을 인정하지 못해서 병원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우울한 세계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김해인 씨를 다시 우울의 방 밖으로 꺼내려면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가 손을 잡고 함께 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열심히 밥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힘들고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잃는 것은 식욕과 삶에 대한 의욕이다. 그리고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에  절망감과 우울감이 꽉 차오른다.

나는 절망과 우울이 차 오르기 전에 따뜻한 밥으로 그 자리에 온기를 되찾도록 해주고 싶었다.

밥을 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내가 일을 하고 돌아와도 방 한 구석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커멓게 앉아있는 김해인 씨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김해인 씨를 방에서 데리고 밖으로 나와 함께 동네를 걷고 커피를 마셨다.

나란히 앉아서 김해인 씨가 그동안 찍은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좋아했던 훌라도 다니지 않고 일할 때 말고는 김해인 씨 옆에 붙어서 끊임없이 떠들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을 때, 김해인 씨는 다시 촬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었는지는 내가 다 알지 못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가는 김해인 씨를 보니 마침내 제주도에 혼자 갈 수 있다!! 생각하며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최근에 김해인 씨가 고백하듯이 말했다.

만약에 나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술 마시다가 죽었거나 ,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이혼하고 술 마시다가 죽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내가 그때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 마음을 들여다봐주는구나.

너도 드디어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구나. 기특하네’

혼자 흐뭇함이 밀려와 빙그레 웃으며 궁둥이를 토닥여주었다.

이십 대에는 오십대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듯이, 막 결혼했을 때는 결혼 이십 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동화책의 마지막처럼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에서 마침표를 찍고 그다음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먼 우주 저 밖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우주 밖의 시간과도 같은 결혼 이십 년 차가 된 우리.

숫자가 특별히 무엇이 중요한가 싶다가도 우리는 마침내, 이제야 진짜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 이제 내 갱년기가 코 앞으로 다가왔으니 모두들 기대하라고!



everything all at once


작가의 이전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