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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비소 Aug 07. 2024

하나의 무대에서 펼치는 각자의 1인극, <태풍클럽>

지금, 이 순간 움직이고 싶은 몸과 타인에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

*해당 글은 영화 <태풍클럽>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85년에 일본에서 개봉한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화 <태풍클럽>이 지난 6월 26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깜깜한 어둠이 내린 밤의 학교, 수영장 한 편에서 왁자지껄한 사랑 노래에 맞춰 쉴 새 없이 춤을 추는 소녀들이 있다. 한참을 무아지경으로 춤추던 소녀들은 같은 반 남학생이 물에 빠진 것을 발견한다. 어디선가 야구부원 남학생들이 달려오고, 이후 연락을 받은 선생님이 등장하여 한밤의 학교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갈무리한다. 도대체 한밤에 학교에서 무얼 하고 있던 거야, 너희들은 전화할 줄도 모르냐, 같은 말을 하면서. 

멈추는 일 없이 춤추는 여학생들과 역시나 멈추는 일 없이 달려 나가는 남학생들로 시작하는 영화 <태풍클럽>은 춤을 추는 이유가 없어도, 달리는 이유가 없어도 개의치 않다는 듯이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뿜어낸다.   

자신의 세계에 빠진 등장인물들 

<태풍클럽>은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구체적인 과거,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조명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움직이고 싶은 몸과 타인에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 어쩌면 몇 번이고 강렬하게 찾아올 태풍의 순간을 비출 뿐이다. 그리고 이 점이 <태풍클럽>을 동시에 여럿이서 펼치는 1인극처럼 만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몸과 마음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그래서 영혼이 몸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처럼 흔들리는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태풍클럽>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그러다가 외부와 충돌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친구들이 앞에서 서로 키스해도 혼자 춤을 추고, 누군가 아픔에 소리 지르며 바닥을 굴러도 크게 웃는다. 태풍이 다가오는 한밤중의 학교 강당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친구들에게 자신이 창가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여줄 때, 인물들은 타인이 자신을 보아주길 바란다. 내가 여기 있음을 온몸으로 외치고 싶어 한다. 서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인물들은 같은 장소에서 1인극을 동시에 펼치고, 특정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로를 바라보고 잠시 같은 극의 인물이 된다.


   

어른들의 부재와 <태풍클럽> 속 어른의 의미 

<태풍클럽> 속 청소년 주인공들과 관계된 어른들은 지나가듯이 등장하거나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부재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크게 상관없는 것처럼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조명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부터 비롯된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사연이나 그들이 보호자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관객은 거의 알 수 없다. 그저 엄마를 부르며 이불 속에서 외로운 듯이 웅크리는 리에와 ‘다녀왔니?’, ‘다녀왔습니다.’를 반복하는 켄을 통해 이들이 보호자를 통한 정서적 안정감을 얻지 못했다고 짐작할 뿐이다. 

한 인물로서 뚜렷하게 등장하는 유일한 어른인 우메미야 선생은 소위 보편적으로 말하는 ‘어른’의 기준에 부합되기에 무리가 있다. 학교의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사귀는 여성의 어머니와 삼촌이라는 사람이 수업 도중 학교에 찾아와 언제 결혼할 거냐며 소란을 피우는 등 체면이 깎이는 망신스러운 일을 겪는다.  우메미야 선생은 아이들에게는 반면교사이자 의지할 수 없는 사람에 가깝다. 

바람을 피우는 여자 친구 대신에 일종의 누명을 쓴 우메미야 선생. 그는 학생들이 학교에 갇힌 폭풍이 부는 밤에 여자 친구의 가족들과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다. 자꾸만 속이 답답한지 우메미야 선생은 갑자기 창문을 열고, 그들이 정신없이 노는 방 안에는 빗물이 들이친다. 우메미야 선생은 이후 학교에 갇혀있으니 와달라는 미카미의 전화를 받고 가지 않겠다고 주정을 부린다. 밖에 태풍이 치니까 가지 않겠다는 말과 모순되게 그는 비바람이 들이치건 말건 자꾸만 창문을 열었었다. 

청소년 인물들처럼 태풍 속을 뛰어다니고 춤추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메미야 선생의 모습을 통해 이 영화가 무엇을 '어른'으로 상정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내가 타인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을 때 

<태풍클럽>의 특정 장면은 관객에게 충격과 깊은 불안감을 준다. 과학 실험실에서 켄이 미츠코의 목뒤로 뜨거운 무언가를 집어넣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장면, 그리고 켄이 자신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미츠코를 끈질기게 쫓아가며 붙잡으려 하는 장면이다. 픽션 속 특정 인물을 두둔하거나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생각해 보면 청소년 혹은 사춘기의 주된 정서와 맞닿아 있다. 

켄은 미츠코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가 늦은 밤 다른 남학생들과 나눈 대화로 미루어보아 켄은 ‘똑똑’하고 ‘귀여운’ 미츠코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츠코는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듯 보인다. 

어느 날, 켄은 과학 실험 수업 도중에 미츠코의 등 뒤로 뜨거운 무언가를 넣는다. 미츠코는 갑작스러운 뜨거움에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한다. 미츠코의 괴로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의 누군가는 크게 웃고, 켄은 관찰하듯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이후 보건실에서 등에 큰 화상을 입은 미츠코가 엎드려 있다. 보건 선생은 켄의 목덜미를 붙잡고 네가 한 짓을 보라며, 이건 없어지지도 않는다며 상처 앞에 켄의 얼굴을 밀어 넣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미츠코의 상처가 코앞에 들이밀어진 상황에서도 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 복도에서 미츠코에서 간단하게 미안이라고 말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하는 말은 아니다.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던 미츠코가 미카미를 끌어안고 엉엉 울자 역시 미츠코도 미카미를 좋아했구나, 라고 할 뿐이다. 켄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향해 있다. 

켄은, 정확히는 <태풍 클럽>의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주인공인 그 세계 안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타인에게 상처 입는 쪽은 늘 자신이다. 자기 자신도 어찌 주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강렬히 인식되고 싶어 한다. 그게 설령 평생 남는 상처를 입히는 쪽일지라도. 

학교에 고립된 폭풍우 치는 밤, 기나긴 롱테이크 추격씬에서 켄은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며 피하는 미츠코를 집요하게 쫓아간다. 거칠게 자신을 붙잡는 켄을 뿌리치며 절박하게 도망치는 미츠코와 멍한 눈빛으로 쫓아가는 장면은 분명 공포스럽다. 켄은 계속해서 미츠코의 몸을 돌려 무언가 확인하려 한다. 

켄은 책상을 발로 부수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미츠코를 붙잡는다. 관객들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 미츠코의 등에 생긴 흉터를 바라본 켄은 갑자기 책상의 물건을 밀어내며 절규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주인공인 자신의 세계에서, 그래서 상처받을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인 세계에서 나와 미츠코의 세계를 마주한다. 미츠코가 느낀 뜨거움과 공포스러움, 흉터, 그렇기에 자신을 피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는 미츠코를 마주 본다. 

해당 장면이 가지는 의미와 별개로, 미츠코가 대수롭지 않게 켄을 용서하고, 영화 속에서 타인을 파괴하려는 방향으로 주체가 되지 않는 애정을 분출하는 게 소년인 켄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태풍클럽>이 비추고자 하는 청소년의 모습이 기울어져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폭력의 주체였던 켄이 피해자인 미츠코 앞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우는 모습을 마냥 받아들이면서 보기에는 영화가 만들어진 1985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 세계의 전부인 존재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려 할 때 

늦잠을 잔 자신을 뒤로한 채 먼저 등교해 버리는 미카미를 본 리에는 이불 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괴로워한다. 이후 다른 친구들이 폭풍이 치는 밤의 학교에서 고립되는 동안 리에는 도쿄로 무작정 떠난다. 전혀 모르는 어떤 성인 남성의 집으로 따라 들어간 리에는 미카미가 도쿄로 고등학교를 가고 나서 시골에 홀로 남겨질 자신이 대체 무엇이 될지 모르겠다며 털어놓는다. 자신에게 전부와도 같은 미카미, 야구부에서 나간 이후로 너무 성숙해 보이는 미카미, 나를 두고 앞으로 가버리는 미카미에게 느끼는 초조함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감정일 것이다. 

영화의 초입부터 선생이 ‘농부의 아이들’이라고 학생을 부르는 학교의 학생인 리에는 미카미에 뒤지지 않는 뭔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저 지금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필요한 미카미가 떠난다는 사실에 초조하고, 그래서 미카미가 곧 가게 될 도쿄에 자신이 먼저 가보는 것이다. 뒤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역시나 폭풍이 부는 도쿄는 자신이 떠나온 시골과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기 어렵다. 분명 음흉한 속내를 숨긴, 리에가 대학생이라고 짐작하지만 아마도 대학생이 아닌 성인 남자는 자고 갈 줄 알았던 리에가 떠난다고 하자 대뜸 뺨을 때린다. 폭풍우 치는 날씨에 바래다주지 않을 거라고 엄포도 놓는다. 하지만 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낯선 이의 집에서 나가버린다. 

돌아가는 길에 어느 상점가에서 오카리나를 부는 기이한 두 사람을 발견한 리에는 자신도 오카리나를 불어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오카리나 연주에 몰두해 있다. 오카리나는 아침에 부는 것, 이라는 두 사람의 말이 갑작스럽게 소화가 된 것처럼 리에는 불현듯 달려 나간다. 그리고 사랑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폭풍우 속을 웃으며 걸어간다. 폭풍이 지나가고 아침이 오면, 미카미 없이 홀로 떠난 자신만의 모험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나 세계 둘 중의 하나는 변해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청소년 영화의 조건에 대해 

너무 잔인하거나, 너무 폭력적이거나, 너무 선정적이라서 청소년을 관객으로 상정한 청소년 영화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1985년 당시 영화를 촬영했던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영하려 했으나 소위 '높은 수위'의 내용을 이유로 상영되지 못했다. 하지만 <태풍클럽>은 현실의 청소년들이 느끼는 세계와 아주 가깝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하고, 사랑받고 싶고, 보이고 싶은 마음을 생애 처음으로 강렬하게 겪고 있어서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성인에 비해 미숙하다던가 어리석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 시간 속에서 처음 겪는 일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서 정제되지 못한, 1인극의 감각으로 살아가며 표출되는 주체할 수 없음이 곧 이런 '자극성'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주인공 청소년들이 통과하며 보여주는 태풍의 시간은 소위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기에 오히려 청소년을 관객으로 상정한 청소년 영화의 조건에 부합한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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