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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Apr 02. 2021

17번 국도에서 만난 봄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피었던 꽃이 지고 있었다. 무너지듯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서 봄이 지나감을 실감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바람이 날리던 날, 17번 국도를 탔다. 순천의 서면을 지나서 곡성까지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이 길은 산을 따라가다 강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코스다. 

 낡고 오래된 내 자동차는 가끔 관절이 아픈지 신음소리를 내지만 한산한 국도를 다니기에는 무리가 없다. 어쩔 때는 너무 오랫동안 나를 태우고 다녀서, 내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치 늙고 눈치 빠른 말처럼 미리 예측하고 가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엑셀은 수공하는 사람이 쥐고 있는 도구처럼 익숙하고, 차체에 가해지는 충격이나, 타이어를 통해 전달되는 바닥의 상태도 바로 느껴져 마치 몸의 일부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송치터널 앞에서 나는 잠깐 외도를 한다. 터널을 통과하여 산을 지나는 일은 빠르고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만 이 터널이 생기기 전에 송치재가 있었음을 나는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길가에 있었으나 모르고 지나치는 작은 길을 찾았고 그곳으로 들어섰다. 등산객을 위한 작은 이정표가 보였고 빛바랜 도로 표지판은 송치재 방향을 알려주었다. 도로는 산으로 구불구불 사라지고 있었고 차선은 오래돼서 탈색된 채로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도로가는 잡초와 이름 모를 꽃들이 뒤섞여있었으나 나름의 질서를 유지해 보였다.


 산이 보였다. 산 벚꽃이 피고 있고 연두색으로 군데군데 피어나는 잎들이 작은 무늬처럼 번지고 있었다. 겨울 동안 짙은 초록색을 띄고 섬처럼 산을 지키던 편백이나 소나무도 새잎을 틔우는 나무를 반기듯이 에워싸고 있었다.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구분이 되지만 뒤섞인 색상은 밝고 생기를 띄었다. 산의 골과 골 사이로, 완만한 능선에도 봄 햇살을 받은 나무가 살아나고 있었다. 산 벚꽃은 감탄사처럼 피고 있었고 오븐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봄산이 연둣빛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봄산의 경이로운 변화를 지켜봤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과 간지러운 바람과 촉촉한 비는 산을 변화시킨다. 화가가 붓칠을 하듯 매일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지나간 시간을 잊게 한다. 

오리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그늘을 만드는 모퉁이를 돌아서자 재의 정상이 보였다. 오래전 재를 넘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휴게소는 사람이나 차량이 없어 썰렁했다. 산의 정상쯤에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보였고 하얀 날개는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풍나무의 새잎이 아가의 손처럼 펴지고 있었다. 졸참나무도 상수리나무도 흔들리고 있었다. 태어나는 많은 것들은 모나지 않고 둥글다. 완두콩의 떡잎처럼 새의 알처럼 가지를 뚫고 나오는 새순은 연하고 부드럽다. 심지어는 선인장의 가시도 새순은 순하고 얌전하다.


 이 길을 나가서 17번 국도로 가야 한다. 터널을 지나지 않고 산의 어깨를 넘어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인적이 드문 길, 이제는 잘 찾지 않는 길이 있다. 과거에는 많이 다녔으나 잊힌 길. 

 오래전 이 길을 다니던 시절, 나는 그 봄에도 피어나는 봄산을 보았을 것이다. 이 길의 어느 모퉁이에서 몽글거리며 다가오는 봄산을 보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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