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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Jan 26. 2022

한 뿔 사슴이 내게 왔다.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아내와 나는 동천 상류에서 천변을 바라보며 차 마시는 시간을 귀하게 여겼다. 주로 오전에 그곳으로 갔는데 한적한 풍경과 어우러진 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면 풍광 좋은 카페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어쩌다 사냥하듯 조심스럽게 걷는 고양이를 발견하면 장난기가 발동한 아내는 차 밖으로 나가곤 했다. 최근에는 드라이브 스루로 커피를 살 수 있는 곳이 생겼고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면서 천변을 잇는 다리가 놓였다. 

 1월 어느 날, 뜨거운 커피 향이 차 안을 가득 채우자 우리는 다리를 건너서 아파트 공원이 조성된 비포장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늘 보던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홀로 선 겨울 가로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고 가지에는 산새 한 마리가 둥글게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바람에 무언가 날리더니 잠깐 비친 햇빛에 하얀 가루가 반짝거렸다. 그리고 하얀 가루는 금세 사라졌다. 이곳은 겨울에도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흩뿌린 눈가루도 때론 반갑게 느껴진다. 오늘처럼 흐린 날에 바람에 떠밀려 날아온 눈은 걸으며 맞기보다 바라보는 편이 좋다. 그것도 물가에서 보게 되면 색다른 신비감이 든다.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면, 동천은 잠에서 깨어나듯 생동감을 되찾고, 멈춰있던 겨울 풍경에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물 위에 떠있는 오리들이 무리 지어 선을 긋고 가면 바람이 뒤따르며 지우기도 하고 어떤 오리는 배처럼 둥실둥실 물결을 타기도 한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산비둘기가 가로수 부근에 일제히 내려앉고 긴 다리 백로는 파수꾼처럼 물끄러미 주변을 둘러본다. 커피 향은 이럴 때 더 깊고 감미로워진다. 추운 바깥 풍경을 따뜻한 실내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면 향기는 더 그윽해지는 것 같다. 겨울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무슨 말을 나누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였을까. 겨울 나뭇가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잠깐, 흔들리던 나뭇가지는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겨울바람이 아내와 나 사이로 휙 지나간 것 같다. 짧은 순간, 고요와 침묵이 지나가자 그 흔들리던 나뭇가지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슴"이라고 말한 것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뿐한 발걸음으로 나타난 사슴은 경계하는지 우리가 있는 방향을 잠시 응시한다. 그리곤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핀다. 고개를 돌리며 정면을 보자 오른쪽 귀가 보이고 그위로 있어야 할 뿔이 없다.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의 어색함이 있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분할 때 놓치지 않고 생각하며 찾아내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대칭을 이루며 있던 것 중에 한쪽이 없으면 그것은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의 뿔이 삭제된 그 모습에서 수줍음이나 비굴함이 느껴지기보단 당당하고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간결하게 휜 한 개의 뿔은 왼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전체적인 균형미로 본다면 전혀 어색하지도 생소하지도 않았다. 단아함마저 느껴지는 한 뿔 사슴은 용맹한 기색도 보였는데 우리가 있는 쪽을 바라볼 때는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잠시 한쪽 뿔을 잃어버린 사슴의 상처나 아픔을 생각했을 것이다. 누구나 고통과 슬픔을 견디고 이기며 살아가듯이 사슴에게도 한 뿔로 남은 사연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잠시 측은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내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노려보고 풀을 뜯는 한 뿔 사슴을 보면서 그 대범함이 부러워졌다.  

무리를 벗어나 홀로 먹이를 찾아온 한 뿔 사슴은 자신 만의 삶의 방식을 개척해가는 특별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뿔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에 맞서는 용기 있는 사슴을 보면서 결손에 굴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실감은 결손과 결여에서 온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오는 공허함은 클 것이다. 즉물적 결손은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쳐 더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래서 주눅 든다거나 의기소침해지고 비굴해지기도 할 것이다. 한 뿔 사슴도 개울가에서 물을 마실 때, 무리들과 뿔 겨루기를 하면서 그런 상황을 직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슴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동천에 나타나 차 안의 우리를 바라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풀을 뜯고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한 뿔 사슴이 사라진 후 우리는 감격했던 것 같다. 커피는 식어 있었고 오리는 여전히 물 위를 낙서하듯 휘졌고 다녔고 아내와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때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파고든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것이 각자에게 스며들고 있음을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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