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겨울 01
한 달에 한 번, 목요일이면 홍대에 간다. 작년 봄부터 다닌 피부관리실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한 차 한잔을 준비해 주신다. 나는 잠깐 앉아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차를 반쯤 마신다. 베드가 준비된다. 몸을 눕힌다. 등이 따뜻하다. 두 시간의 관리가 시작된다.
몇 년 전, 갑자기 기미가 생겼다. 말 그대로 갑자기. 깜짝 놀랐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썼으니 적당히 가려졌다. 그래서 치료가 늦어지기도 했다. 재작년 겨울, 더는 미룰 수 없어 피부과에 갔다. 두 주 간격으로 열 번 레이저 치료를 받았는데 갑자기 생긴 기미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다. 속상했다. 아이가 특목고에 진학하며 함께 마음고생을 했는데 내게도 주어진 훈장 같은 건가 싶어 달고 가야 하면 해야지 했다. 그래도 속상했다. 기미는 그럼 됐고. 꾸준히 다닐 관리실을 알아보았다. 코로나에 걸린 후 대상포진까지, 내 면역력이 바닥났구나 싶던 차였다.
선생, 방송작가, 교재개발자를 거쳐 다시 사교육장의 선생으로, 프리랜서가 된 지도 오래다. 딱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는 프리랜서는 그 외의 시간 몸값 하기 위해 자신을 든든하게 채워두어야 한다. 나는 그에 더해 엄마이기도 했으니 길게는 이십 년, 빡빡하게는 십이 년, 아이, 일, 집안일, 세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저글링 곡예사였다. 재미있었다. 아이는 예뻤고 욕심나는 좋아하는 일이었고 몸은 힘들어도 집 안이 잘 정리돼 있으면 편안했다. 내 세계가 구축됐다.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리지는 않았다. 월화수목금금금, 영혼까지 불태우며 산다고 생각은 했지만 견딜 만했다. 그런데 몸만 쓴 게 아니었다. 몸을 쓴 게 문제가 아니었다. 프리랜서 워킹맘은 마음을 써야 했던 것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일 생각. 아이가 없는 시간에도 아이 생각. 집안일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 누워서도 일, 아이, 내일 할 일.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린 걸 번아웃이라 하던가. 그런데 번아웃 될 걸 알면서 공이 떨어지게 둘 수 없어 다시 공을 던지는, 아픈데 아플 수 없어서 아프지 않아지는, 나는 그런 상태였다. 그리고 잘 몰랐다. 아이가 수능을 보고 돌아와 가채점한 저녁. 삼 년간 단 한 번도 못 맞춘 적 없는 수능 최저등급까지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오밤중에 오열했다. 난생처음 소리 내 울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참았구나.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기를 기다렸구나. 마음을 다 써버렸구나.
몸을 다 쓴 사람은 몸을 쉬어 주면 되는데
마음을 다 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앉았다. 쓰고 싶은 마음을 울음 삼키듯 꾹꾹 삼키던 날이 있었다. 시간이 없어.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없잖아. 대신 박완서 작가의 말을 품었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내 말로 바꾸어 읽었다. ‘난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쓰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러니 괜찮아. 그렇게 2년이 지나간 줄도 몰랐다. 마음을 다 쓴 사람, 울음을 삼키던 사람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무 때나 울었고 민폐인 줄 알면서 친구에게 몇 시간이나 하고 싶은 말을 쏟았다. 걱정하고 있을 어른들에게 안부도 전하지 않았다. 꿈을 꾸었다. 봄빛이었다. 아이는 대학에 가고 나는 미뤄둔 글을 쓰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든 나를 잘 돌봐야지. 나를 돌보는 시간을 보내야지. 봄빛 꿈을 꾸는 시간만큼은 우아했다. 앞날을 몰라서 우아할 수 있었다.
첫 수능이 끝나고 다음 해 1월 7일, 아이가 기숙학원에 입소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나는 허둥댔다. 재수를 결정하고 아이는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에서 진출해 공부하던 거실까지 치웠다. 나도 합류했다. 아이 보내고 허둥대며 서재, 주방, 쌓아 올린 책까지, 주저 없이 버렸다. 원 없이 버렸다. 팔다리가 아프도록 들고 날랐다. 오래된 수업 자료, 더는 나를 유혹하지 않는 물건들. 버리자고 마음먹으니 끝도 없이 나왔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허둥댔다. 몸을 움직이면 허둥대는 줄 잘 모르겠었다. 후련했다. 이십 년 살림살이가 단박에 단출해지진 않았지만 실수할까, 실패할까, 꼭 쥐느라 얼마나 힘주고 살았는지도 몰랐던 내가 손을 폈다. 훌훌 털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물건들을 본다. 방을 본다. 책상 위에 놓인 읽고 있는 몇 권의 책이 소중하다. 저것만 빼고 다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아.
마음먹고 아이와 단둘이 술 마시러 나간 어느 날이었다. 가고 싶었던 꼬치구이 집, 오코노미야키도 맛있다고 했다. 주종은 소맥. 배가 고팠기에 접시 가득 올려진 가쓰오부시의 춤은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술이 막 달았다. 소주 두 병, 맥주 세 병, 소녀와 엄마는 두 여자가 되어 얼큰하게 취했다. 당연히 꼬치도 시켜 안주발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시킨 오뎅탕이 달아, 달았어, 달더라, 세 번쯤 말하고 아, 나 취했군 그랬다. 집에 가서 잭콕 먹자. 술이 술을 부르는 법이지. 엄마가 딸을 꼬셨다. 품종 딸기 비싸서 안 사 먹었는데 지갑도 막 열렸다. 잭다니엘 사고 딸기 사고 새우깡이 아니라 정새우도 샀다. 나의 여자 동지는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는 롱패딩을 입고 길바닥에서 점프했다. 둘이 시시덕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딸은 영상을 찍었다. 얼굴이 나왔다 안 나왔다 하는 길고 긴 영상, 나의 공중 점프 샷은 딸 핸드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다.
얼굴도 많이 좋아졌고 매달 가는 것도 번거로운데 그만 갈까. 문득 그런 마음이 스쳤다. 피부관리실 말이다. 마음까지 돌볼 여유가 없을 때 그동안 내가 쓴 방법은 루틴을 만드는 것이었다. 피부관리실도 그중 하나였다. 스케줄에 나를 잘 묶어두었다. 관리실 침대에 두 시간을 반강제로 누워 있자면 핸드폰도 없고 일어나지도 못하니 머릿속으로 일을 했다. 딴생각도 많이 했다. 수시 원서를 넣은 9월부터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모델링팩을 떼면 고였던 눈물이 조르륵 흘러내려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냥 가만히 누웠는데 몸을 쉬지 말고 마음을 쉬세요, 하는 말이 떠올랐다. 방법은 여전히 모른다. 마음을 쉬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만 알았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는 은유 작가의 말을 좋아했다. 맞아, 그냥 사는 사람 없고 그냥 산 인생 없지, 덧붙여 또 품었다. 한 달, 마음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살지 않은 시간이었다. 물건도 마음도 다 버린 곳에 공간이 남아 있었다. 텅 빈 공간.
그래서 쓴다. 쓰기로 한다. 용기가 있어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나면 용기가 난다. 지금은 하루를 살아갈 만큼의 힘이면 충분할 것 같다. 내가 나에게 가장 다정한 인사를 건네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