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옷을 접는 손길, 곁을 떠나는 인연에 대한 예의
누구에게나 삶의 소임을 다하고 물러나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람에게는 은퇴라는 이름으로, 사물에게는 폐기라는 문장으로 그 마지막이 기록되곤 한다.
대개의 경우 소용이 다한 존재는 차갑게 외면당하거나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기억 밖으로 던져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낡은 서랍이 비워지던 날, 나는 버려지는 것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장엄하고도 다정한 퇴장을 목격했다.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해진 내복과 빛바랜 셔츠들을 방바닥에 하나둘 펼쳐 놓으셨다.
그리고는 마치 새 옷을 선물이라도 하듯,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그 옷의 주름을 정성껏 펴고 결대로 차곡차곡 접기 시작하셨다.
구멍 난 양말 한 켤레조차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단정하게 짝을 맞추어 뭉치는 그 뒷모습은,
흡사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수행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할머니, 어차피 버릴 옷인데 뭐 하러 이렇게 힘들게 접으세요?"
나의 철없는 물음에 할머니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으시며 마지막 옷자락의 매무새를 훑으셨다.
그 짧은 침묵 속에 담긴 철학을 그때의 나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그 옷가지들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당신의 생을 수십 년간 껴안아 준 고마운 동행이었다.
비록 쓸모를 잃었을지언정 자신을 가려주던 그 고결한 헌신을 아무렇게나 구겨진 뭉텅이로 취급할 수 없다는 무언의 예우였다.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면, 할머니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 옷들은 비로소 자신의 소명을 완성했다는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 손길은 그것들을 다시 거두어 갈 이름 모를 타인을 향한 가장 낮은 형태의 배려이기도 했다.
누구의 수고로움이 깃들어야만 비로소 세상이 순환한다는 것을 할머니는 평생의 삶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가지런히 접힌 옷들은 그것을 수거해 갈 누군가의 손목에 가해질 무게와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다정한 안부와도 같았다.
우리는 흔히 소유하고 있을 때만 가치를 부여하지만, 진정한 인간의 격은 인연이 다한 것을 보낼 때의 뒷모습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새것을 탐하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지만, 낡은 것을 정중히 대하는 마음은 오랜 시간 숙성된 인격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취하고, 더 쉽게 내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타인의 수고를 상상하기보다 나의 편리함을 앞세우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할머니의 그 '접는 행위'는 끊어졌던 관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작은 기적이다.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넘어, 그 물건이 거쳐 갈 세상의 모든 경로까지 자신의 책임 안에 두는 그 너른 품.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재건해야 할 삶의 최종적인 형태가 아닐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엉망으로 엉킨 채 내동댕이쳐지는 일상들 속에서,
할머니가 남긴 단정한 옷뭉치들은 나에게 묻는다.
너를 지탱해준 수많은 존재들에게 너는 어떤 마침표를 찍어주고 있느냐고.
이제 할머니의 그 단정한 뒷모습을 닮아 나의 일상을 돌아본다.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들을 대하는 나의 손길은 과연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만큼 다정한가.
소용을 다해 버려지는 것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품격을 잃지 않도록 결을 다듬어주는 그 정성은,
결국 나 자신의 영혼을 단정하게 접어 올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 구부정한 허리와 느릿한 손놀림은 단순히 헌 옷을 정리하는 가사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정갈하게 갈무리하는 가장 우아한 마무리의 연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께서 버려지는 것들의 결을 다듬는 그 정성은, 결국 언젠가 낡아질 나 자신의 삶을 미리 안아주는 가장 경건한 준비가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