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한 사유의 잉크 뒤로 숨겨둔 비겁한 욕망의 민낯
지난 수많은 기록 동안 나는 세상의 낮은 곳을 살피고, 생존의 존엄을 읊조리며, 자본의 비정함을 날카롭게 비판해 왔다. 잉크에 철학을 섞어 쓰듯, 문장 하나하나에 인본주의적 가치를 담으려 애썼고, 때로는 예언자라도 된 양 독자들에게 성찰의 삶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면 위에 활자로 새겨진 그 고결한 통찰들이 내 일상의 궤적과 얼마나 일치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고개를 들지 못한다. 글 속에서는 임산부석의 혐오를 꾸짖으면서도 현실의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피로를 핑계로 눈을 감아버리고, 자본의 가림막을 비판하면서도 내 책이 베스트셀러 가판대 명당에 오르길 남몰래 갈구하는 것이 나의 지독한 민낯이다.
우리는 모두 문장만큼 근사하게 살지 못한다. 머리로는 비정한 경마장의 시스템을 혐오하지만, 내 자산의 수치가 소수점 단위로 오르내리는 것에는 심장이 요동친다. 낚싯바늘에 찢긴 생선의 비명을 글로 옮기면서도, 저녁 식탁 위에 오른 매끄러운 생선 요리의 가격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순을 매일 반복한다. 고귀한 정신적 가치를 역설하는 손가락으로 정작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스마트폰을 켜서 나의 효율성을 체크하는 일이다. 글은 성스러운 영역에 머물고자 하나, 발은 이미 진흙탕 같은 세속의 욕망 속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이러한 괴리는 가식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사유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서글픈 생존 방식에 가깝다. 우리는 고결한 문장을 쓰며 잠시나마 비루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그렇게 얻은 정신적 위안을 연료 삼아 다시 자본의 전쟁터로 나간다. 내가 쓴 글들은 사실 세상을 향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처절한 반성문이자 들키고 싶지 않은 참회록이었을지도 모른다. 글이 번드르르해질수록 현실의 나는 더 작고 초라해졌으며, 그 간극이 주는 부채감이 다시 펜을 들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모순은 인간의 본질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고 쓰면서도 내 아이의 성적표에 더 집착하고, 물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쓰면서도 새로 나온 전자기기의 사양을 검색하는 이 이중성은 우리 모두가 짊어진 굴레다. 하지만 이 모순을 인식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비록 행동이 문장을 따라잡지 못할지언정, 그 간극을 부끄러워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다는 마지막 저항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한 성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모순적인 존재인지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마침표를 찍어왔다.
이제 나는 내 글이 만들어낸 환상에서 내려와 다시 비루하고 치열한 자본의 현실로 복귀한다. 내일의 나는 또다시 효율을 따지고, 작은 이득에 일희일비하며, 오늘 쓴 이 고백조차 잊은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서랍 속 100편의 기록은 내가 가장 인간답고자 했던 찰나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문장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그 비겁하고도 절실한 투쟁이, 역설적으로 내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마지막 문장이 된다.
번드르르한 문장 뒤에 숨어 자본의 달콤함을 탐닉하는 나의 모순은, 어쩌면 이 비정한 시대에 사유의 주권을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가장 인간적인 몸부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