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생존권을 지켜준다는 명분과 인간의 편의를 위한 폭력적 통제의 경계
입양 공고문이나 동물병원의 안내판에 적힌 '중성화 완료'라는 문구는 안도감을 준다. 그 다섯 글자는 동물이 인간의 거실에 머물기에 안전하고 무해해졌다는 보증서처럼 통용된다. 현대 반려 문화에서 중성화 수술은 유기 동물의 발생을 막고 질병을 예방하는 윤리적이고 이타적인 선택으로 여겨지지만, 그 합리적인 명분의 껍질을 벗겨내면 거기에는 동물의 원초적인 생식 본능을 인간의 주거 환경에 맞춰 도려낸 이기심이 서늘하게 놓여 있다. 우리는 동물이 울부짖지 않기를, 가구를 망가뜨리지 않기를, 오직 우리 곁에서 정서적 안정을 주는 무결한 존재로 남기를 바라며 그들의 생명력을 메스로 거세한다.
이 행위의 기저에는 '인간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곧 동물의 행복'이라는 오만한 전제가 깔려 있다. 정작 수술대 위에 오르는 대상자인 반려동물은 자신의 신체 일부가 소실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단지 인간의 아파트 거실에서 불협화음 없이 공존하기 위해, 그들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연의 에너지를 강제로 상실당한다. 발정기의 스트레스를 덜어준다는 이타적인 변명은 역설적으로, 그 본능적 표출을 지켜보는 인간의 불편함을 제거하려는 이기심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적인 욕구를 '문제 행동'이라 규정하고, 의학의 힘을 빌려 그들을 문명 사회의 무해한 반려 인형으로 길들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수술을 멈출 수 없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중성화를 거부했을 때 감당해야 할 무분별한 번식과 그로 인해 길거리로 내몰릴 유기 동물들의 비참한 생애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기심과 이타심은 뒤섞인다. 나의 편의를 위해 본능을 자르는 비정함과, 더 큰 사회적 비극을 막기 위해 작은 폭력을 선택하는 합리성이 한 그릇에 담긴다. 결국 반려동물의 중성화는 인간과 동물이 이 비좁은 도시에서 공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모순적이고도 서글픈 통행료인 셈이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고, 그 결손을 통해 얻은 정적을 평화라 부른다.
중성화 수술은 인간이 타자의 영역을 잔인하게 재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존적인 거울이다. 우리는 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면서도, 그들이 가진 야생의 불꽃이 나의 안락함을 방해할 때는 가차 없이 메스를 든다. 이 역설은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의 본질을 뚫는다.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 나의 세계에 무해하게 편입시키기 위해 상대의 일부분을 거세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수술 자국이 아문 반려동물의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가 지켜낸 것이 진정 그들의 권리인지 아니면 나의 정돈된 일상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그 맑은 눈망울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백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이 통제가 사실은 나의 안녕을 위한 비겁한 거래였음을. 동물의 본능을 희생시켜 얻은 이 고요한 거실의 안식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의 파편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중성화 수술은 우리가 생명을 책임진다는 오만 뒤에 숨겨진, 지울 수 없는 이기심의 상흔이자 인간이 자연에게 저지르는 세련된 형태의 야만이다.
사랑이라는 숭고한 허울을 쓰고 반려동물의 원초적 본능을 도려낸 그 수술 자국은, 사실 우리가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춰 난도질해온 이기심의 비정한 흉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