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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Feb 27. 2020

17세기 마녀부터 2019년 마녀까지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를 중심으로 

0. 감독 로버트 에거스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자 그에게 선댄스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입니다. 요즘 잘 나가는 제작사 A24에서 제작을 맡았고, 이걸로 주목을 많이 받아서 로버트 패틴슨과 빌렘 다포가 출연한 <등대지기>(2019)도 제작되어 개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VOD로 풀린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수입사들의 마인드가 도통 이해가 안 갑니다.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A24 영화 중에서 <더 페어웰>, <에이스 그레이드> 등 외국에서는 입소문이 자자한데 우리나라로 들어오지 못한 영화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간 원래 로버트 에거스는 세트 디자이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인터뷰에서 아주 솔직하게 디자이너는 돈 때문에 한 것이고, 원래 꿈은 감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세트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물론이 거와, DP들과 자주 대화해야 했기 때문에 장면 연출에 관해서는 이미 이해를 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극에 관한 열정도 크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디자이너 출신이어서 그런지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성취해야 하는 기대치가 있으면 그만큼 사람들이 열심히 참여한다고 느껴 현대극은 아직까지 관심이 없다고 하네요. 또 에거스가 인터뷰에서 <더 위치>에 영향을 준 영화들을 많이 밝혔습니다. 크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과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1972)를 자주 언급합니다. 그 외에 비평가들이 짚은 점들은 아서 밀러의 연극 <시련>, 영화 <레퀴엠>(2006)과 <렛미인>(2008)입니다. 영화 외적으로는 고야의 그림에서 마녀적인 이미지를 많이 참고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 영화가 이렇게 많은 칭찬을 받은 건 단순히 이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서 비평가들이 아는 척하기에 용이해서가 아니라, 그 영향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롭고 자신감 넘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길예르모 델 토로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델 토로의 초기 작품을 많이 밀어준 알폰소 쿠아론이 크레딧의 thanks to 리스트에 있더군요. 크레딧 디자인까지 예스러운 것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5년 동안 공부를 해서 역사 고증에 신경을 쓴 것도 사람들이 칭찬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1. 영화 <더 위치>

  <더 위치>는 17세기 뉴 잉글랜드에 이주한 영국인 청교도 가족이 농장에서 쫓겨나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서 쫓겨나는지가 좀 중요합니다. 이 가족이 저지르는 첫 번째 실수, 혹은 첫 번째 악행이거든요. (적어도 영화 관객인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첫 번째죠) 아버지가 대충 ‘너네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7 대죄에서 바로 자만(pride)입니다. 자만은 아버지 캐릭터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사탄과 마녀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하나 둘 죽어나갈 때 그것이 터무니없는 애들 얘기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계속 표하죠.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이성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는, 전형적인 17세기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의 데카르트적 사상을 가진 가부장입니다. 아버지 이외에도 토마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7 대죄 중 하나씩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분노(wrath), 쌍둥이는 게으름(acedia), 그리고 남동생 케일럽은 근친상간(fornication)의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 믿음에 따르면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악마와 마녀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죠. 비평가들은 토마신 가족의 '죄악'과 '은총'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악마의 저주를 이끈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저는 종교 배경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전개가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관주의로 보입니다. 아무튼 영화는 토마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어나가면서 끝나요. 특히 동생 케일럽의 기도문을 가장한 오르가슴적 죽음의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토마신을 제외한 사람들만 죽어나가기 때문에 그녀는 서서히 가족 구성원들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이 의심은 당연히 그녀가 당대 유행했던 괴물, '마녀'인 것으로 수렴됩니다. 실제로 17세기에 마녀는 ‘유행’했습니다. 기이한 현상이 어떻게 마녀에 의해 일어났는지 사람들이 기록하고, 그것을 인쇄해서 마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마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네요. 마녀의 화형 재판 또한 당시 종교전쟁 중 신앙이 약해지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현혹하기 위한 일종의 스펙터클로 쓰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서양 문화권에서 그들의 전신으로 자부하는 르네상스가 꽃피운 이후의 시대에 마녀 재판이 유행했다는 것이 믿기 어렵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지금도 4차 산업이네 뭐네 '발전'했다고들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은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긴 하죠. 


2. 포크 호러 (folk horror) 

  '마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선댄스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바바둑>(2014) 같은 아이들 동화에 기반한 페어리테일 호러나 <더 위커 맨>(1973)을 전신으로 하는 포크 호러 장르로 구분했습니다. 포크 호러는 보통 영국 시골과 그 전통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요즘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한데, 최근에 개봉한 <미드소마>(2019) 같은 영화가 이 포크 호러 장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드소마>의 special thanks 리스트에 로버트 에거스가 올라가 있습니다.) 포크 호러에서 공포 요소는 '과거에 이미 편입되었어야 하는 무언가'를 볼 때 느끼는 묘함(uncanny)입니다. <더 위치>는 찢어질듯한 음악도 그렇고, 빨려 들어 갈듯이 연출한 숲도 무섭지만 (이런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40년대 렌즈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대사가 무섭습니다. 토마신 일가의 대사는 마녀의 주술만큼이나 현대 관객에게 무서운 것입니다. 블랙 필립으로 불리는 검은 염소 외의 다른 가축들도, 심지어 인간인 쌍둥이들도 어딘가 좀 무서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섬같이 고립된 지역에 외지인이 들어가면서 그 지역 사투리나 할머니들의 특유의 강압성이 공포에 대상이 되는 영화가 있죠. 그러니까 <더 위치>에서는 사탄이나 마녀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 그 자체와 그곳을 배경으로 편집증(paranoia)에 빠져드는 인간들이 공포스럽습니다. 사실 현대 관객에게 마녀가 그리 무서운 주제는 아니죠. 애들 동화에서 나올법한 이야기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실제 공포였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는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더 위치>와 <미드소마>의 경우 주인공이 거기에 내가 속해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혹은 그 가능성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주인공에 이입한 관객의 공포는 커집니다. 영화 비디오 에세이 유튜브 채널 What's So Great About That의 'Kill list: The Folk Horror Revival'는 이런 말로 영상을 마무리합니다: "Maybe we don't fear being the outsider as much as we fear that we too belong here, and we always did"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웃으면서 끝난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불행 중 다행입니다. 


3. 여성괴물, 마녀들- 오즈의 마법사부터 빌리 아일리시까지 

  왜 마녀를 소재로 했냐는 질문에 로버트 에거스는 어렸을 적 마녀의 존재와 세일럼(미국 매사추세츠 주 북동부에 있는 도시. 지명인 세일럼은 예루살렘을 줄인 것이다.) 마녀재판에 관해 배웠을 때 흥미로웠다고 했는데, 결정적으로 마녀는 <오즈의 마법사>(1939)를 봤을 때부터 두려웠다고 합니다. 현대 관객으로서 두려웠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바바라 크리드도 그녀의 책 <<여성괴물>>에서 웃기거나 마법적인 존재가 아닌 '무서운’ 마녀의 이미지가 영화에서 등장한 첫 번째 사례 중 하나가 <오즈의 마법사>라고 지명합니다. 그 뒤에 마녀가 나오는 언급할만한 영화로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피리아>(1977)과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가 등장하는데, 이 글에서는 <캐리>와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로우>(2017)를 <더 위치>를 비교하며 이야기하려 합니다. 


3-1. <캐리>

  <캐리>와 <더 위치>는 둘 다 주인공이 사춘기, 더 정확히는 성인이 되기 직전의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죠. <캐리>의 주인공 캐리는 고등학생인데, 동일한 나이로 <더 위치>의 시절의 여자아이였다면 벌써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겠죠. 두 영화 모두에서 두 여자아이들의 2차 성장 징후가 중심적으로 다뤄집니다. <캐리>에서는 샤워를 하다가 생리혈을 본인이 처음으로 보고, 이것을 발견한 친구들과 엄마가 조롱 및 억압을 합니다. 한편 <더 위치>의 토마신의 경우 동생 케일럽의 남성 시선(male gaze)에 의해 발견됩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2차 성징을 겪음과 동시에 마녀로 낙인찍히는 전개는 아주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일단 마녀는 '홀린다'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 (많은 경우 섹슈얼한 일이겠죠, 사랑의 감정은 오래전부터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을 설명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 탓을 해왔는데, 그중 고전적인 것이 마녀죠. 요즘에도 '마녀'라는 말을 안 할 뿐이지 여자들은 남자들 혹은 가부장 사회의 일원들이 어떤 어려움이나 혼란을 겪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꽃뱀'이나 '슬럿 셰임(slut shaming)' 대표적입니다. 여자아이가 2차 성징을 겪는다는 것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성애자 남자들에게 성적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그녀들은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혹은 동의 없이) '홀리는'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마녀에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내지 혐오도 있지만 여성 스스로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성적 대상이 되는 두려움과 타인이 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버트 에거스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근대  초기 시절에 악한 마녀가 남성의 여성에 관한 두려움, 양가감정 그리고 환상을 표방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 초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악한 마녀는 그들 자신의 힘에 대한 여성들의 두려움, 양가감정, 환상과 욕망이기도 합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누군가를 화나게 하면, 그녀는 자신이 그런 반응을 누군가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악마의 소행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비극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악한 마녀라고 생각하는 거죠.”   

  토마신의 경우 그저 어렸을 때에는, 즉 성적 존재가 아닐 때에는 가족의 구성원이었을 뿐이었는데, 성장을 한 뒤에는 남동생과 아버지를 홀린다고 엄마에게 의심받습니다. 이것은 쌍둥이 여자 형제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여동생은 남자 쌍둥이랑 같이 다니면서 '여자'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은데, 안야 테일러 조이는 묘한 얼굴부터 느낌이 다릅니다. 토마신이 '나도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 알 수 있듯이,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두려움입니다. 그 안에 편입되고 싶은데 그녀의 운명이라든지 본질적인 무언가가 그것을 절대 실현 불가하게 만들죠. 여자의 생산성을 상징하는 닭의 알, 염소의 우유 모두 먹을 수 없는 피로 바뀝니다. 토마신이 엄마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가족은 먹을 게 없어서라도 몰살됐을 것입니다. 


  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나게 청교도스러운 엄마 아래서 자란 캐리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2차 성징과 함께 나타난, 혹은 강해지는 자신의 '염력'이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그녀를 가로막고, 친구들 내지 남자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부터 방해합니다. 이런 갈등 사이에서 캐리의 능력은 결국 폭발해버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캐리와 캐리의 가족은 파멸합니다. 그러니까 해피엔딩이 아니에요. 우울한 결말이긴 하지만 캐리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향해 가해진 폭력에 일조한 사람들을 깡그리 처벌하는 전개는 통쾌하고, 여성영화로서 파격적이긴 합니다. 한편 <더 위치>의 경우 주인공 토마신의 입장에서 보면 영화는 해피엔딩입니다. 토마신이 그녀를 억압하고 배척하는 가부장제와 기독교 문명을 벗어나 자연, 여자들의 사회로 들어가 그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으니까요. 쉽게 말해서 모든 정체성 문제가 그러하듯이, 억압하면 고통받고 인정하면 편해지는 것입니다. 


3-2. <로우>

  <로우>의 주인공 쥐스틴도 그러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스포일러) 쥐스틴은 마녀는 아닌데 식인종입니다. 근데 쥐스틴 가족은 아주 철저한 채식주의자예요. 엄마부터 식인종이기 때문에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그렇게 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쥐스틴의 가족이 토마신 가족처럼 그녀를 대놓고 억압하고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쥐스틴은 수의대학에 입학한 후 대다수 대학 새내기들처럼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남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육욕을 발견해요. <로우>에서도 가부장제에서 성적인 존재로 '만들어지는' 여성과 여성의 '괴물성'은 함께합니다. 가장 대표적 장면이 언니 알렉시아가(언니도 식인종입니다. 가족의 여자들은 대대적으로 식인종이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집니다) 성인 여자는 응당 왁싱을 해야 한다며 왁싱을 해주는데, 이 장면이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쥐스틴이 반항하다가 언니 손가락을 잘라서도 그렇지만, 언니가 쥐스틴을 계속 강제로 눕혀서 왁싱을 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니가 자신의 손가락이 잘린 걸 보고 실신한 사이, 잘린 언니의 손가락을 먹으면서 쥐스틴은 자신이 단순히 육식을 즐기는 게 아니라 인육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 위치>에서 토마신이 자신의 가족을 떠나서 (혹은 자신의 가족이 편리하게 없어져서) 그 바깥의 세상에 편입이 되었다면, <로우>의 쥐스틴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그것을 고백한 후 다시 가족 안으로 포용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캐리>가 남성 감독의 70년대 작품, <더 위치>가 남성 감독의 2015년 작품, 그리고 <로우>가 여성 감독의 2017년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각 결말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4. '요즘' 마녀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과 빌리 아일리시 2집 'where do we go when we fall asleep?'의 앨범 커버


  좀 더 동시대적인 마녀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훨씬 긍정적인 빛(?)에서 다뤄지고 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녀=불가피한 파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젠 마녀도 자아 성찰을 할 수 있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전설에 나오는 마녀들은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염력이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쓰는 존재를 대체로 마녀라고 했죠. 그런 의미에서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의 일레븐은 티피컬한 마녀입니다. 일레븐도 마찬가지로 그 능력을 권력을 가진 남성 인물이 그것을 조종할 때는 불행하다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고 그 능력을 조절할 줄 알 때 행복해집니다. 그러면서도 시즌3까지는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그 능력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책임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전까지는 여자 주인공들이 본인의 능력에 잠식되었다면, <기묘한 이야기>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 성장 곡선(character arch)으로서 시리즈 전체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해 나온 빌리 아일리시의 앨범 'where do we go when we fall asleep?' 앨범에서는 악마, 악령의 테마가 자주 나와요. 본인이 자신이 어렸을 때 악몽이나 무서운 상상에서 나온 귀신들 같은 존재에 관해 쓴 앨범이라고 하는데, 트랙 'all the good girls go to hell'에는 'all the good girls go to hell/ cause even god herself has enemies/ and once the water starts to rise/ and heaven's out of sight/ she'll want the devil on her team/ my lucifer is lonely' 같은 가사에서는 그런 악령에 자신을 대입한 것을 암시합니다. 17세기에 악마라는 존재가 중세와는 달리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 변모하고, 종교재판이 끝나면서 18세기부터는 그 악마가 내부로 들어왔다고 믿었다고 하죠. 그래서 '악마와 동일시한다'는 생각이 엄청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만, 그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울과 삶의 긍정이 결정되겠죠. 이런 경향을 단순히 ‘걸파워’라는 개념으로 해석되기는 어렵고, 외부와 내부의 두려움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예전에는 여자들에게 그런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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