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에서 첫 번째 질문에 답했다. 하나의 시선이 책의 한 지점을 비췄으니, 이제 방향을 바꿀 차례다.
선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자리다. 점과 다른 방향에서 책을 바라본다. 점이 안을 향했다면 선은 밖을 향한다. 점이 원인을 물었다면 선은 결과를 묻는다. 점이 한 인물을 보았다면 선은 다른 인물을 본다.
왜 방향을 바꾸는가. 입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2장에서 말했듯, 같은 방향을 향하는 두 시선은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대상을 볼 때, 그 사이에서 깊이가 생긴다. 선은 그 ‘다른 방향’을 담당한다.
점에서 선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필요하다. 점의 결론을 맺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으로 이동해야 한다. 넘어가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방식 1: ‘그런데’로 방향 틀기
점의 결론을 확인한 뒤, ‘그런데’로 새로운 질문을 연다.
『칼의 노래』 서평에서 점의 마지막은 이렇다.
“소설 속 이순신의 독백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면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선의 시작은 이렇다.
“이순신을 죽이려는 것은 왜군만이 아니다. 소설을 읽으면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이순신의 또 다른 적은 바다 건너가 아니라 바다 이쪽에 있다.”
명시적인 ‘그런데’가 없지만, 방향이 바뀌었다. 점에서는 이순신의 내면을 보았다. 선에서는 이순신을 둘러싼 외부를 본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시선의 전환을 느낀다.
방식 2: 질문을 명시적으로 던지기
점의 답이 새로운 질문을 불러오는 방식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서평에서 점은 “자본주의는 왜 미래를 낳지 못하는가”를 다뤘다. 선으로 넘어가며 이렇게 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불임이고 괴사인데, 왜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 사회는 이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하는가.”
점의 답(“자본주의는 미래를 낳지 못한다”)이 새로운 질문(“왜 아무도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가”)을 불러온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방식 3: 소제목으로 구분하기
소제목을 달아 점과 선을 명확히 구분하는 방식이다. 네 편의 서평 모두 이 방식을 사용한다.
『칼의 노래』 서평: “점: 왜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했는가” → “선: 이순신의 죽음을 원하는 적은 누구인가”
『과학산문』 서평: “점: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의 시선은 무엇이 다른가” → “선: 시선은 어떻게 만나는가”
소제목이 질문 자체를 담고 있어서 독자가 방향을 바로 알 수 있다.
선에서 할 일은 점과 같다. 질문을 구체화하고, 근거를 찾고, 답을 제시한다. 다만 방향이 다르다.
점과 선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자. 둘은 대등해야 한다. 선이 점의 부속품이 되면 안 된다. 선도 독립적으로 서평 한 편의 주제가 될 수 있을 만큼 묵직해야 한다.
『칼의 노래』 서평에서 선의 전개를 보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옥에 가둔다. 왜군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빌미로. 그가 싸워서 지킨 나라가 그의 손에 형틀을 채운다. 왜 그런가. 이순신이 너무 유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임금의 무능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점에서 이순신의 내면을 다뤘다면, 선에서는 이순신을 둘러싼 세력들을 다룬다. 조정, 임금, 명나라 장수들. 이순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왜 그들이 이순신을 적대하는지 분석한다.
선의 결론은 이렇다.
“왜군이 그를 죽이려 한다. 아군과 응원군이 그를 죽이려 한다. 더 나아가 고질병이 그를 죽이려 한다. 이것이 소설이 그려내는 이순신의 진짜 전쟁터다.”
점과 선 사이에는 긴장이 있어야 한다. 같은 방향을 향하면 긴장이 없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야 긴장이 생긴다. 긴장의 유형을 다시 보자.
방향의 긴장: 안과 밖. 『칼의 노래』 서평이 이 경우다. 점은 이순신의 내면(안), 선은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밖).
주체의 긴장: 서로 다른 인물. 『과학산문』 서평이 이 경우다. 점은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의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 선은 그 다른 시선이 어떻게 만나는지.
층위의 긴장: 개인과 시스템. 『자본주의 리얼리즘』 서평이 이 경우다. 점은 자본주의가 미래를 낳지 못하는 현상, 선은 사회가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메커니즘.
시선의 긴장: 대상과 대상을 보는 눈.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평이 이 경우다. 점은 무감각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작가의 시선, 선은 침묵을 강제하는 권력의 작동.
어떤 유형이든, 점과 선이 다른 곳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 면에서 교차할 수 있다.
선을 전개하면서 점의 내용을 언급해도 될까. 된다. 다만 방식이 중요하다.
점의 내용을 반복하면 안 된다. 점에서 이미 말한 것을 다시 말하면 중복이다. 선에서 점을 언급할 때는, 점의 결론을 전제로 깔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서평에서 선의 시작을 보자.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불임이고 괴사인데, 왜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가.”
“불임이고 괴사”는 점의 결론이다. 선에서는 이것을 전제로 깔고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점의 내용을 반복하지 않고, 점의 결론 위에서 출발한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평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것인가,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것인가.”
점에서는 “사람들이 왜 무감각한가”를 다뤘다. 선에서는 질문을 바꾼다.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것인가.” 점의 결론을 뒤집어서 새로운 시각을 연다.
선도 전체 서평의 20~25%를 차지한다. 점과 비슷한 분량이다.
점과 선의 분량이 비슷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둘이 대등해야 면에서 균형 잡힌 교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점이 500자인데 선이 200자면, 면에서 점 쪽으로 기울어진다. 점이 200자인데 선이 500자면, 면에서 선 쪽으로 기울어진다.
물론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 내용에 따라 한쪽이 조금 더 길 수 있다. 그러나 큰 차이가 나면 균형이 무너진다. 점과 선의 분량을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선에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점과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 점에서 이순신의 내면을 다뤘는데, 선에서도 이순신의 내면을 다르게 다루면 방향이 같은 것이다. 이러면 면에서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점의 내용을 반복하지 않는다. 점에서 한 말을 선에서 다시 하면 중복이다. 선은 새로운 내용을 가져와야 한다.
셋째, 면의 내용을 미리 말하지 않는다. 점과 선이 만나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는 면에서 밝힌다. 선에서 미리 “이 둘을 합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고 말하면 면의 역할을 빼앗는 것이다.
넷째, 점보다 약하게 쓰지 않는다. 선이 점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면 안 된다. 선도 독자적인 해석을 담아야 한다. 근거도 충분히, 결론도 명확하게.
『과학산문』 서평의 선 부분을 보자.
소제목: “시선은 어떻게 만나는가”
점에서는 두 과학자의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 다뤘다. 물리학자는 축소하고, 천문학자는 확장한다. 선에서는 방향을 바꾼다. 다른 시선이 어떻게 만나는가.
“방향이 다른 시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이 책의 형식이 그 비밀을 품고 있다. 편지다. 주고받는다. 한쪽이 말하면 다른 쪽이 듣고, 듣던 쪽이 다시 말한다.”
책의 형식(편지)에서 답을 찾는다. 점에서는 내용(시선의 방향)을 다뤘다면, 선에서는 형식(주고받는 구조)을 다룬다. 내용과 형식, 다른 층위에서 접근한다.
“시선은 빛과 같아서,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오는 빛이다. 빛을 보내기만 하면 독백이다. 빛이 돌아와야 대화가 된다.”
서평자의 해석이 들어간다. 시선을 빛에 비유하며, 대화의 본질을 짚는다.
인용도 들어간다.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속해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라는 물방울이 이 물방울에도 접하고 저 물방울에도 접해서, 서로 다른 방울방울의 표면장력을 한데 모아 최소화하는 장면을, 그래서 내가 더 큰 물방울이 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심채경의 문장을 인용해 근거를 댄다. 물방울의 비유가 선의 핵심 이미지가 된다.
선의 결론은 이렇다.
“두 과학자의 대화도 그렇다. 물리학이 천문학이 되는 것도, 천문학이 물리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닿아 있다. 닿아 있으면서 더 커진다.”
선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자리다. 점과 다른 방향에서 책을 바라본다.
점에서 선으로 넘어갈 때 자연스러운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로 방향을 틀거나, 점의 답이 새로운 질문을 불러오거나, 소제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점과 선 사이에는 긴장이 있어야 한다. 방향의 긴장, 주체의 긴장, 층위의 긴장, 시선의 긴장. 어떤 유형이든 서로 다른 곳을 향해야 면에서 교차할 수 있다.
선의 분량은 점과 비슷하게, 전체의 20~25%. 점과 대등해야 면에서 균형이 잡힌다.
다음 장에서는 점과 선이 만나는 자리, 면을 다룬다. 두 시선이 교차해서 새로운 해석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