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따뜻한 느낌이 드는 시를 좋아한다. 이번 글은 시집을 읽고 쓰는 서평이기에, 감성을 담아 표현하자면, 뭔가 몽글몽글한 촉감을 가지면서도, 푹신한 담요를 덮어주는 듯한 느낌의, 쌀쌀하지만 붉음을 머금은 가을밤 같은 시들과 푹푹 찌는 한낮과 대비되는 나른한 여름밤 같은 시가 좋다. 쓰고 나니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느낌적으로는 이렇다.
그래서 장석남 시인의 「배를 매며」와 같은 적절한 은유 속에 먹먹한 기쁨을 느끼게 하는 시를 좋아한다. 또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나온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과 같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물리학과 결합하여 아름답게 표현해낸 시나,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과 같은 문학적 발상이 뛰어난 시조도 좋아한다. 이러한 작품들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시나 시조들을 보면, 따뜻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거나, 일상 속의 따뜻함을 이야기해주는 작품들이 주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시집은 내가 좋아하는 따뜻함을 머금은 시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한 단어와 단어와의 관계와 결합, 또 배치에 따라 느낌이 어쩔 때는 상큼했다가, 또 어쩔 때는 흑빛이다가, 또 어쩔 때는 나른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등 느낌이 아주 확연히 달라지는데, 이 시집은 단어들의 조화에 의한 효과를 잘 살린 느낌이 들었다. 작품들마다의 느낌, 분위기, 문체, 주제 등이 아주 다양하기에 전체적으로 이 시집은 어떠한 시 모음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독특한 단어 배치로 신선함을 느끼게 하며 그 속에 우리의 일상을 담아 다양한 일상의 조각들을 보여주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를 고르자면, 1부의 「내가 알던 A의 기쁨」, 「상태」, 2부의「외곬」이었는데, 이 세 작품 외에도 한 작품 작품을 읽을 때마다 순간 멈칫하고 계속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문장들도 굉장히 많았다.
알루미늄 캔 속에 콜라가 가득하고 콜라 속에 탄산이 가득하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A에 대해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A의 결말은 A의 것이 아니다 (…) 이제 와 나는 A와의 관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콜라를 흔들면 누구나 참을 수 없다 없어서, 없는 이유마다 이유를 펼치고 펼친 이유를 열고 연 이유를 펼치고 열고 펼치고 열고 열고 (…) 당위를 기록한다 알루미늄 캔이 얼마나 나약한지, A는 능동이었다고 소리치지만 사실 A는 A가 되는 동안 한 번도 능동인 적이 없었다 압력(press)에 있어 우울(depression)은 합당하게, 콜라 캔을 흔들 상황에서 콜라 캔을 흔드는 건 마땅해야 하지 않나 고백을 기록한다
- 「내가 알던 A의 기쁨」중에서
「내가 알던 A의 기쁨」은, 'A'와 '콜라'와 '탄산'이라는 단어들의 조화와 함께 내용이 이어지는데,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단어들 사이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듯 이어질 듯 계속해서 이어지는 결합에 감탄했다. 정확히는 시인의 단어들을 연결하는 힘에 감탄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었을 때, 잘 보지 못했던 독특한 단어 조합을 좋아하는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A의 거짓말-나약함-죽음-비웃음-죽이기엔 기쁜 날'이라는 단어로 이어지는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괴하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이런 단어들 사이에서의 '콜라'와 '탄산'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기에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다.
친밀 중의 사람들을 어찌할 수 없다
출생 중의 태아를 어찌할 수 없다
결심 중의 결심 중의 결심 중의 결심을 어찌할 수 없다
견디지 않는 중의 상태를 견디는 중의 상태를 어찌할 수 없다
(…)
터지는 중의 폭탄을 어찌하고 싶지 않다
여백 중의 여백을 어찌하고 싶지 않다
(…)
이별 중의 사랑을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 중의 이별을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신념 중의 도취를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
(…)
상태 중의 상태를
없는 중의 없음을
있는 중의 있음을
노력 중의 노력을
- 「상태」중에서
「상태」라는 시는, 읽는 내내 정말 공감이 많이 갔던 작품이었다. '어찌할 수 없다-어찌하고 싶지 않다-어찌하지 않기로 했다-어쩌겠나 싶어-어찌하지 말자고-어찌할 수 없고'라는 서술어의 흐름이 이 서술어의 대상을 그 상태로 놔두려는 시인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 어찌하지 않으려는 대상은 달리는 중의 개가 될 수도 있고, 친밀 중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엮이는 중의 팔짱이 될 수도 있고, 넘치는 중의 술잔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이 시를 읽으며 깨달았던 것은, '내가 너무 모든 상태를 신경 쓰고 오래 생각해서 힘든 건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만 보아도, 그냥 그 상태로 놔두고 바라보면 되는 것을 자꾸 들쑤시고 건드리고, 가만히 두지를 못하고 계속 생각하고 생각한다. 나의 상황을 예로 들면, 이미 나는 현재에 살고 있는데, 순간순간 과거를 생각해 힘들어하거나, 또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해 불안에 잠식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상태」는 너무나 익숙하게 모든 것을 신경 쓰고 살고 있었던 나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기에 감사한 작품이면서도, 일상 속 우리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살 수 있는 작품인 듯하다.
어느 동네에나 늙어버린 이들은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모여보려고 기웃기웃 대지만 먼저 말이라도 걸면 지는 기분 같아 말은커녕 발도 걸지 못하고 기웃대기만 하는데, 어쩌다 구실 좋게 장기판이라도 하나 있으면 자식들에게 뜯어낸 용돈이나 걸어두고 말도 섞고 웃음도 섞고 주먹은 못 섞으면서 뭔가 자꾸 섞어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이다. (…) 노인이 슬쩍 졸을 열면 나는 저 먼 까마귀 한번 보고 졸을 열어 보이며 수를 주고받기 시작하였는데, 형세는 나쁠 것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불편했던 건, 노인네들이 언제부터 친했었다는 듯 끼리끼리 모여 낄낄대고 나의 젊음을 질투하지 않기라도 하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기 때문이었었다.
- 「외곬」중에서
다음으로 2부의 「외곬」이라는 시는, 외면적으로는 백발의 노인들 무리와 장기를 두는 내용인데, 백발의 노인들 무리와 시인의 모습과의 조화에서 이 시를 읽는 내내 정다운 느낌을 받았고, 코믹한 장면도 많았던 시였다. 앞서 이 시집은 내가 좋아하는 따뜻함을 머금은 시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말했었는데, 이 시는 예외적으로 아주 짧은 소설 같은 느낌도 들면서, 따뜻하고 다정한 분위기의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을 읽다 보니, 이영재 시인이 어쩌다 이런 단어를, 문장을, 시를 쓰게 되었을지 궁금한 마음에 작가의 인터뷰를 창비 출판사의 블로그에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근황에 대한 질문에서 이영재 시인이 한 대답이, "기초대사량이 떨어진 몸에 맞춰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돈을 벌 궁리를 뒤늦게 시작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기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조금은 뻗대볼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시인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시는 무엇이냐라고 묻는 질문에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모두 아픈 손가락이어서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슬럼」인 것 같습니다."라고 이 시집의 제목이 쓰여있는 작품을 이야기하였다.
시인의 인터뷰를 통해 느낀 것은, 이영재 시인이 이 시집 안에 담은 작품들은, 시인 자신이 힘든 시기에 있었을 때 쓰였기에 그의 '아픈 손가락' 마디 마디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슬럼」이라는 시의 제목인 '슬럼'은, 우리들 대부분이 '슬럼프에 빠지다'라고 할 때 쓰는 단어인데, 아픈 손가락 중에서 굳이 「슬럼」을 골랐다는 것은 시인 자신이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어쨌든 그런 힘든 시기들을 지나 어떤 것으로, 어떤 사람으로 되어가는 그 과정을 담은 것이 이 시 모음이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일상의 조각들과 함께 시인 자신의 아픈 손가락을 독특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보여주는 이 시집은, 일상을 새로운 언어로 접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시집을 읽게 된다면, 이영재 시인의 아픈 손가락을 보여주는 신선한 표현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본 글의 도서는 창비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서 제공받은 것입니다. 책을 읽고 난 후 감상은 오로지 저의 생각입니다. 서평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신 창비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네이버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pure_bon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