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버리고 나는 다시 가져오고

남편의 병이 또 도졌다. 뭐에 하나 맘 상하면 자신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만 보이는 병이다. 증상은 이렇다. 첫 번째, 전화를 안 받거나 혹은 말을 하지 않고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두 번째, 자신이 보기에 맘에 안 드는 물건들을 다 갖다 버린다. 어제는 말도 없이 외박을 하고 왔고 오늘은 뭐에 꽂혔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그게 무엇이든지 상관 않고 베란다에 갖다 버렸다. 특히 청소기를 갖다 버리려 현관에 내놓았는데 참 재미있다. 이사를 하면서 본인이 직접 사 온 것인데, 청소기에 필터가 빠져있다는 이유로 필터는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본체는 현관에 내놓았다. 나는 남편이 방에 있는 사이 다시 필터를 결합해 방에 갖다 놓았다.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났는지 다시 씩씩대며 청소기를 현관 앞에 내놓았다. 진짜 버리려는 건지. 내가 힘들게 청소하라고 복수하려는가 보다. 뭐,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남편은 또다시 다른 사람이 되어 편집광적인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미친놈 하며 코웃음을 쳤다. 남편의 행동을 이해는 해보겠지만 절대로 공감할 수는 없다. 남편은 오로지 자신만이 보일 뿐이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상한 감정들을 곱씹으며 복수에 눈이 먼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에 빙의가 된 듯,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켜 내려가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다 맞춰 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보다는 자신의 생각에만 갇혀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만의 절대적인 규칙들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곤 한다. 한동안 괜찮은 것 같았는데 그 사람과의 결혼을 후회하고 아이들을 홀로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하는 순간을 그는 또 내게 선물해 주었다.


그가 방문을 닫고 마음을 닫았듯이 나도 방문을 닫아 버렸다. 그 사람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시선을 차단시키려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에게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때 반응을 한다는 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평온히 잠든 아이들을 깨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둘째의 발작과 같은 행동은 다시 시작이 되었다. 잠에 들기 전 울고 싶거나 소리 지르고 싶을 때 안아주기로 약속했는데 발작처럼 벌어지는 아이의 행동은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는 말들을 해보았다. 아쉽게도 그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남편을 피해 방으로 데려가 문을 닫고 남편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아이의 울부짖음에 막내까지 깨어 어쩔 수 없이 나는 막내를 안아 다시 재워야 했다. 둘째 아이는 발로 바닥을 쿵쿵 치기 시작해 다시 아이를 잠자리로 데려와 토닥이며 재웠다. 남편은 방으로 들어갔고 다행히도 아이의 울부짖음은 줄어들었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남편도 불쌍하고 둘째 아이도 불쌍하다. 어쩌다 아이가 이지경이 되도록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게 된 건지. 모든 것이 남편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탓도 있음을 알기에 무조건 남편을 탓하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수용받지 못한 어린 시절이 있어 그것이 아이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기에 무조건 남편과 헤어지려 작정할 수는 없었다. 이젠 더 이상 그의 행동과 말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 같다. 어차피 나의 말과 행동이 그에게 만족스러울 수 없기에 그의 만족을 얻기 위해 내 생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살아야 하기에 그런 그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그동안 충분히 대응해 보았지만 그의 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인정하고 직접 상담소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해결책은 없을 것 같다. 자기 인식, 그에게 필요한 과제이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업이다.


그를 더 이상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맞추려고 노력하지도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부부는 종속관계가 아님을 알기에, 나도 그런 상황에 순종할 수도 헌신할 수도 없다. 오로지 나에겐 사랑스러운 아이들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남편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두려움에 떨고 우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갈등을 무조건 회피하고 두려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해 나갈 것이다. 적금도 끊지 않고 계속 이어 부을 것이다. 언젠가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생활비를 대고, 아이들 교육비를 댈 것이다. 남편도 그게 더 좋을 것이다. 외적인 능력을 키우려 하는 것보다 자신이 가장 편안한 공간으로 들어가 온순하게 지내는 것이 그의 성향으로 보아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자신이 잘 보이고 잘하는 청소와 살림을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하고 명령하지 않기를 바란다. 눈앞에 있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분출할 기회만 엿보는 것 같아 그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내가 경제적으로 책임 질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버리고 나는 다시 가져오고, 남편이 또다시 버리고. 나는 이제 모른 척하려 한다.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하하 웃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