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물기를 바싹 말린 텀블러에 커피를 담는다. 신혼 초 선물 받은 일리 커피 머신에서 쪼르르 흘러나온 샷 하나면 충분하다.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넣은 텀블러는 온기로 가득하다. 아마도 다음날 새벽 5시 30분까지 원두의 향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미리 준비한 도시락과, 이 텀블러를 챙겨두면 출근 준비가 끝난다.
도시락 3개월 차, 이제는 커피까지 싸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을 하거나, 놀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둘 다 관심이 없었다. 대신 '커피'엔 욕심이 있었다. 일에 지쳐 힘들 때, 야근을 해야 할 때,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브런치를 먹을 때, 이 모든 순간에 난 커피를 꼭 찾았다.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물과 얼음을 가득 담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면 정말 충분했다. 문제는 그런 커피를 하루에 두 세잔 넘게 마신다는데 있었지만.
다행히 카페인에 민감하지 않아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잠을 못 자거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거나 하지는 않은 체질이었다. 내 몸이 커피를 '거부' 할 때까지 마신 적도 수없이 많다. 허니버터브레드에 아메리카노, 아침을 안 먹은 날엔 아이스 바닐라라테, 달달한 것이 먹고 싶을 땐 아이스 카페모카에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것 등 나름의 상황에 맞는 커피를 선택해 하루를 버텨냈다. 물론 커피 한 잔의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깝지 않았다. 사이렌이 그려진 테이크 아웃 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들고 가는 순간, 알 수 없는 만족감으로 행복해졌기 때문에 커피를 빼놓은 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직장 생활이 너무 버겁고, 자취 생활이 오래되어 외로움이 사무치던 해에는 매일 아침 7시, 스타벅스 오픈 시간에 맞춰 커피를 사 먹었다. 커피를 빨리 마시는 편이 아니고, 일이 바빠 제대로 마시지 못해, 아침에 사 온 커피가 점심때 다 식어야만 먹을 여유가 생겼으면서도 커피 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에 5,,000원씩 최소 20일 내내 사 먹으면 한 달에 100,000원 가까이 쓰는 것인데, 당시는 그 값이 아깝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몇 달을 생활해 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근무 했던 직장 근처에는 그 흔한 커피숍 하나 없었다. 두 곳의 직장 모두 '카페 불모지'였던 것이다. 일 할 땐 늘 옆에 커피를 놓고 먹으며 일을 했는데, 회사 반경 1km 안에 커피숍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커피로 수혈을 해야 머리도 팽팽 돌고 능률이 오르며, 스트레스도 푸는 내게는 아주 슬픈 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믹스커피, 카누, 혹은 편의점 컵커피를 사다가 먹었는데 어쩐지 2%씩 부족했다. 결국 그런 날엔 퇴근길에 어김없이 스타벅스에 들렀다.
그런데 그 역시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때의 나는 미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가정이 있는 애 엄마였다.
그때의 나는 나를 위한 선물이니 뭐든지 해도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아이의 물건이 먼저 사고싶은 엄마이자 괜히 남편에게 미안해지는 아내였다.
'너 먹고 싶으면 언제든 사 먹으라'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호기롭게 커피숍에 들어가도 5,000원이면 아기 간식을 사줄 수도, 떡을 사서 떡국을 끓여 남편과 함께 먹을 수도 있다는 계산에 선뜻 카드를 내밀기 망설여지는.
그러다 보니, 커피를 먹고 싶은 강한 욕망과, 그 돈이면 우리 셋이서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성이 늘 충돌했다.
그때, 아일랜드 식탁 수납장 저 아래에 깊숙이 처박혀있던 5년 된 일리 머신이 생각이 났다. 신혼 시절, 남편의 사촌 형으로부터 온 일리 커피머신. 아이를 낳고는 원두 추출하는 기계음이 너무 소란스러워 몇 번 쓰다가 차마 쓰지 못했던, 일리 커피머신이.
"웬만한 커피숍보다 일리 원두가 더 나을 걸? 한 번 먹어봐."
남편이 말했다. 일리 원두는 품질이 좋아 웬만한 커피숍의 커피보다 맛이 좋을 수 있다고. 네가 커피 맛을 유난하게 따지는 편이 아니니까, 일리를 먹어보면 너한테는 딱 맞을 수도 있다고.
실제로 그랬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입맛이지만 드르르륵 소리와 함께 추출된 고소한 원두 향은 후각을 자극했고, 맛도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매우 맛있었다. 혹시 몰라 일리 캡슐 18개 (1팩)만 구입해 며칠 먹어 보니 만족스러웠다. 커피숍이 없는 직장이라며 맨날 투덜대던 내가 의욕을 보이자 남편은 응원하며 여러 가지 제안을 했다.
"이 김에 바닐라 시럽도 사는 게 어때? 설탕 보단 맛이 좋을 거야."
"내가 예전에 일본에서 산 텀블러가 좋아. 그 걸 써봐."
"우유도 좀 살까? 그럼 나도 라테 정도는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까."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남편의 진심이 느껴졌다.
‘네 말대로 직장 앞에 커피숍이 없어 스트레스 풀기가 힘들다면, 차라리 우리 집 커피를 싸가도 되잖아, 그래도 되지 않을까?’
라고 신경 써주는 남편의 마음이 느껴진 그날, 결심했다. 커피도, 싸가기로.
남편의 말마따나 맛이 정말 괜찮았다. 전 날 저녁에 준비해 두었음에도 '인스턴트커피'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침에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출근하겠다고 얼마나 많은 커피숍을 찾아 해메였던가. 그때마다 느낀 초조함 따윈 없었다. 당장 에코백 안에 좋아하는 맛의 커피가 있으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게다가 돈도 굳고,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니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그렇게 벌써 석 달 넘게 나는 텀블러 안에 물 대신 커피를 담아 다니고 있다.
누군가가 보면 뭐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할 수 있다. 심하게 말하면 지지리 궁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므로 부끄럽지 않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현실, 커피 불모지에 있는 직장에 근무,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아내라는 ‘상황’ 속에서도 맛 좋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내가 한 최선의 선택이니 만족스럽다. 게다가 가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사거나, 편의점에서 달달한 컵커피를 사기도 하는 유연함도 있으니 더욱 괜찮다. 할 만하다.
남편이 말하는 나의 가장 큰 단점은 늘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임신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임신을 하고 산모교실을 다니고 싶었지만 직장이 멀어서 안 되고, 임신 중 무리하면 안되고, 산모교실에 가면 홍보가 너무 많아서 안 되고, 그런데 산모교실은 가고 싶고, 하며 고민의 무한 루트 돌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100% 맞았다. 매 순간 내가 처한 현실에 맞춰 생각했다. 직장이 너무 멀어서 안 돼, 번거로워서 안 돼,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어서 안 돼, 따위의 생각들은 가뜩이나 소심한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현실을 탓하기만 하니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없으니 내 현실은 늘 같은 배경으로 반복이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금 상황에 안주하게 됐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엔 반드시 위험요소가 뒤따른다. 어떤 변화냐에 따라 출혈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뭐라도 꿈틀거리는 순간 내 삶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처음부터 뭔가 크게 시작할 용기도 없고 자신도 없는 나 같은 소시민에겐 이 정도의 변화, 이 정도의 노력이 딱 알맞다. 작지만 확실한 움직임은 큰 파동이 되어 조금 더 크게 삶을 바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벌써, 석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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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텀블러 속에 600원짜리 커피를 담는다.
그리곤 속으로 외친다.
‘늘 먹던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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