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이 일이 된다면

by ANNA

아주 오래전,

활자중독자로 닥치는 대로 글을 읽었던 40여 년 전에 읽었던 글이라 이것이 잡지에서 본 건지, 책에서 본 건지, 교과서에서 본건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지면에서 아직까지 내 뇌리에 확실히 박혀 있는 글귀가 있다.


영화평론가가 쓴 글로써,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기억을 되살려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것이다.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돈을 번다니 얼마나 행복하겠느냐고.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업’이 되는 순간, 그 감정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하루 종일 영화를 의무처럼, 막말로 토가 쏠릴 만큼 억지로 보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영화평론가가 된 나 자신을 뼈 때리도록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업이 아니라,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로 남겨두라고'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와닿아서인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문장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못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화평론가와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나는 여행을 직업으로 삼았다.




나 또한 한때, 아니 어쩌면 지금도 여행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여행에 대한 로망은 국민학교 시절 내 손에 들어온 누런색의 세계명작 전집에서 시작되었다.
백여 권에 달하는 그 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보다 훨씬 넓고 낯선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는 톰 소여처럼 모험을 꿈꾸었고,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 같은 의인을 꿈꾸었고, 신데렐라처럼 백마 탄 왕자를 만나길 바랐다.
그 모든 상상 속에는 언제나 ‘WHERE?’이라는 질문이 함께 있었다.

여행은 그렇게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삶의 가능성을 향한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여행은 막상 해보려고 하면 참으로 어렵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돈과 시간이 모두 있어도 이번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다음으로 미룬다.
다음 달에,

내년에,

조금 더 여유로워지면.

그리고 그렇게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조금씩 인생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퇴사를 하고서야 비로소 시간이 생겼지만, 대신 돈이 사라졌다.

생활비를 아껴가며 떠난 여행들 속에서 나는 우연히 ‘돈을 벌며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한 가지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다.

아, 여행을 하면서도 먹고살 수 있구나.

그 꿈은 곧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결국 현실이 되고, 나는 실제로 돈을 벌며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야기는 나의 기대대로라면 여기서 동화처럼 끝났어야 했다.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한 줄의 해피엔딩으로..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 브런치북은 아마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패키지투어를 인솔하면서 본 여행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세상에 이런 여행이 있다니,

세상에 이런 손님들이..

세상에 이런 일정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의 패키지 상품은 사람을 여행자로 대하지 않고 원가표 속 숫자로 만들어버렸다.

싸게 팔린 여행은 결국 싸게 취급받는 사람을 만들어냈다.

손님을 ‘모셔야 할 존재’로 과하게 떠받드는 문화는 오히려 손님을 괴물로 만들었고,
가이드는 손님 눈치를 보며 자기 일을 스스로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가이드는 돈을 쓰지 않는 손님이 밉고,
손님은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가이드가 서운하다.

여행은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불신만 남는다.


그래서 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제값을 내고 제대로 존중받는 여행을




서비스의 '서'자도 모르던 내가 난생처음 손님이란 존재를 맞이하며 수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여행업을 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그 세계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까지 모두 보아버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행업이란 어떤 세계란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내가 꿈꾸는 여행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이것은 성공담도, 실패담도 아니다.

그저 여행이 일이 되었을 때 사람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다시 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