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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May 19. 2022

추앙보다 존중

그들의 이해관계 <임현>


수희님  안녕하세요

지금 막 베란다 식물에 물을 주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화분의 흙이 쉽게 마르는 계절이 왔어요. 여름에는 식물을 위해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해요, 지금 있는 화분 서너 개는 내가 돌볼 수 있는, 딱 맞는 개수인가 봐요.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가는 저도 피곤하고 식물도 불쌍해지고 말아요. 그걸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햇빛 아래 서서 미쳐 바르지 못한 선크림 생각이 나면  아! 여름이 시작됐구나 생각해요. 그러면서 반소매나 얇은 여름옷을 입어야 할 텐데 하고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작년보다 분명히 더 굵어졌을 팔뚝과 두툼한 상체를 가릴 방법이 도무지 없는 계절이니까요. 목이 가늘고 길었던 시절이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전이라 빛바랜 앨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더라고요, 며칠 전 반소매 티셔츠를 꺼내 입고 우연히 정말 우연히 전신 거울을 보았답니다. 그건 정말 찰나였어요. 그러나 시간이 짧았다고 해서 볼 걸 못 보지는 않아요. 쇄골 속으로 점점 들어가고 있는 목과 둥그렇고 푸근해진 어깨와 완전히 굳어버려서 옆구리 운동은 하려야 할 수 없는 호두나무 같은 단단한 몸통. 뒤태가 안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지, 모르긴 몰라도 설날 받은 세뱃돈을 3년 정도 모아놓은 장지갑만큼이나 두툼한 등짝일 게 분명합니다.


수희님 설마 제가 날씬해지고 싶어서 말이 많아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저는 날씬해지는 건 오래전에 포기했어요. 날씬 보다는 건강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특히 부어 보이는 등짝은 순환의 문제라고 해요. 저는 그놈의 순환에 취약하답니다. 제 몸이 아픈 건 대부분 순환이 원활치 않은 거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루에 몇 번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짧게 아프다가 죽고 싶으니까. 약으로 연명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에게 짐이 되기 싫으니까. 아무튼 건강에 진심이 되었어요,  며칠 전에는 유튜브를 열심히 봤어요.뻣뻣한 상체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운동을 찾다가 나이가 비슷한 여성 분이 운영하는 채널을 발견했어요. 오 마이 갓! 그분의 몸매는 버드나무처럼 나긋나긋, 움직임이 연체동물 같았어요, 심지어 목에 가로 주름이 하나도 없었고 뒤에서 보면 필라테스 강사라고 해도 믿겠더라고요, 지금도 그분이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아주 밝고 건강한 미소를 지으며 엄청난 하이텐션으로 했던 말, 여러부우우운! 낙수물에 바위가 쪼개지는 거예요! 꾸준함의 힘은 무서운 거랍니다! 매일 10분만 자기 몸에 투자하세요! 파이팅! (아...... 네..... 화...화이팅,,,,)



수희님! 대수롭지 않게 초고 쓰기 모임 있잖아요. 지난 월요일 거기에서 다이어트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어요. 나는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자주 훌쩍거립니다. 이번 글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사람을 볼 때 몸매부터 보게 된다. 그리고 마른 몸을 만나면 오... 더럽게 말랐네. 완전 기아 수준이다. 도대체 무슨 복을 받았길래 저리 말랐나. 통통한 몸 때문에 평생 고민을 했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신경 쓰며 살았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만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한다. 스캔을 당하는 입장이 되면 눈빛으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자신이 남을 쳐다보는 건 괜찮다고 여긴다. 평가는 평가로 끝나지 않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신을 죽도록 싫어하게 되거나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핑계를 된다. 날씬한 몸이 세상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라도 좀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수희님 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오랜 시간 사유한 이 분의 고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픈 사람 마음은 아픈 사람이 알아주고 가난한 사람의 형편은 가난했던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말이 사실일까. 정말 그럴까? 알아주는 마음이라는 것이 진심일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 건 아닌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지.

도덕과 윤리라는 공허한 말은 그저 상황에 따라 있다가 형편에 따라 없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남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요. 내기 뱉은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지 어떨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한 말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져요.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렇게 말하지 말지.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저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그 순간에는 도무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볼 여유가 없어요. 나는 언제부턴가 공감한다는 말도 섣불리 할 수 없어졌어요. 사는 건 어쩐지 확신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그때그때 낯선 상황만 눈앞에 펼쳐질 뿐이라서 그에 맞춰 자의적인 논리를 갖다 붙이며 자기를 설득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꺼이 설득당했으니 어떤 선택을 해도 죄책감 같은 건 없고요. 흔히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큰 틀에서 봤을 때 얘기고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 놓고 보면 가족 간에도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다르잖아요. 아침으로 볕이 들고 저녁으로 서늘해지는 자리에 앉아 허둥지둥하느라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건 돌아볼 여유가 없지요. 심지어 가족이라도 말이에요.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었다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는 장자의 말처럼  편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늘이 드리워진 남의 인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가 이런 인간이라는 게 생각할수록 참 쓸쓸하지만 모두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 해요. 누구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별 볼 일 없다는 것. 뚱뚱한 사람도 날씬한 사람도 똑같이 별 볼 일 없고 장애가 있어도 없어도 다르지 않고 지병이 있는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노동자도 대통령도 다 똑같은 그냥 인간이잖아요. 나는 추앙이라는 단어를 듣고 도대체 추앙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숭배 같은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요  알마 안가 '추앙'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냥 존중 정도면 어떨까. 누구나 공평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가 된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는 게 바빠서 언제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었는지 모른 체 살아가요. 심지어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조차도 집에 가서 씻고 저녁 먹고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나곤 하죠.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무시하고 무시당하는지도 모르는 삶.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우! 생각만 해도 싫어요.





이런 무서운 생각을 하다 보면 나라는 인간이 그나마 책을 가까이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져요. 수희 님 오늘 편지는 [그들의 이해관계]라는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을 소개하려 합니다. 기묘하고 슬프고 가슴을 치게 억울하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웃픈 상황이 끝없이 전개되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와 비슷한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의 심리 변화와 그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에 이틀을 푹 빠져 지냈어요. 나는 줄거리를 설명하기도 어려운 이 책을 사람들이 꼭 읽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한 말을 하고 싶어하는 여러 단편들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한동안 한국 소설을 멀리하며 지냈는데요. 좋은 소설가를  발견한 기분이에요. 앞으로 임현이라는 소설가가 쓴 책을  꾸준히 찾아 읽게 될 것 같아요. 책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 쓰다 멈추고 쓰다 멈추다 보니 하루 종일 편지를 썼네요

그럼 건강히.


2022.5.19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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