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깃발들

by 브라이언


깃발은 한때 영광의 상징이었다. 점령된 성에는 새로운 주인의 깃발이 걸렸고, 새로 탄생한 국가들에게는 신선한 국기들이 주어졌다. 1969년 아폴로 11호는 달에 성조기를 꽂았고,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대한민국 전역에는 광기 어린 태극기들이 휘날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깃발과의 기분 좋은 동행은 깃발의 임종과 함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무의미한 깃대에 힘없이 걸려있는 현대의 깃발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의 잔재를 연상케 한다. 날마다 심해지는 먼지와 바람에 깃발의 시체는 얼룩으로 물들어갔고, 뿌연 하늘과 색이 비슷해져 가는 깃발은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히고 있다.


세상은 기우는 중이다. 내 발바닥의 감각은 우리가 가파르지는 않지만 꾸준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 스스로가 차근차근 깔아낸 이 길은 우리를 천천히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 모두 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저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다.


저무는 해가 뿜어내는 광선은 뿌연 먼지가 가득한 공기를 뚫고 대지의 우중충함을 잠시나마 몰아낸다. 색이 바래 아무 내용도 알아볼 수 없는 대형 광고판들은 여린 그림자를 드리우고, 한때 당당했던 낡은 건물들의 차가운 콘크리트 벽은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띤다. 추락하는 해와 폐허가 될 문명은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다만 서서히 무너질 문명과 달리, 잠시 지평선 아래로 숨어든 태양은 내일 아침이 되면 얄밉게 돌아와 불사조처럼 다시 밝게 연소할 것이다.


언젠가 폐허로 남을 문명 위, 깃발의 시체들은 보기 좋게 자멸한 우리를 깔볼 것이다.

그 잘난 깃대가 그때까지 서있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