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팔십이라고, 그동안 잔병은 많았지만 수술을 해야 하는 심각한 병은 없었다. 그래서 건강한가 보다, 별 의심 없이 지내다 갑자기 눈에게 뒤통수를 크게 맞은 셈이었다. 주업이 디자인인데, 눈이 안 보여도 가능할까? 귀가 안 들리는 작곡가는 들어봤어도, 눈이 안 보이는 디자이너는 못 들어본 것 같다. 암담했다. 안약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터넷을 뒤져봤다. 원인은 안압과 시신경 손상이고 주의해야 할 것은 음주, 스트레스, 독서... 독서?
내 평생 유일하게 지속하고 있는 취미인 독서를 자제해야 한다니, 아쉬우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자제하자. 이제 책은 그만 보고 속 편하게 쉬는 거야!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건 아니야! 마음먹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서재에 쌓여 있는 책더미가 아른거렸다. 그 책은 반납일이 내일이고, 저 책은 모레인데... 그건 베스트셀러라 그냥 반납하면 몇 달을 또 기다려야 할 텐데... 몸과 달리 마음은 쉬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동화책을 들고 온 아이들에게 옆구리 공격을 당했다.
"엄마아~ 책 읽어 줘~"
아이들 동화책을 몇 권 읽어주고 나니 하품이 절로 났다. 나도 모르는 새 슬그머니 서재로 도망쳐 다시 내 책에 빠져들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이 주었던 충격은 채 하루도 가지 못했다. "녹내장 초기네요."라는 말이 "녹내장 초기네요."라는 말로 쉽게 곡해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눈으로 할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겁내면 어떡하라고. 언제나처럼 미래의 녹내장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반납일이 임박한 베스트셀러를 읽어치우는 게 급했다.
어쩌면 녹내장은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지독한 고도 근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지인은 나의 렌즈 도수를 듣더니 "너 정도면 군대 면제야."라는 말을 했더랬다. 원래 렌즈를 쓰지만 가끔 안경을 쓰는 날엔 -눈이 어쩜 이렇게 작아질 수 있냐며- 다들 박장대소를 하곤 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 중 적어도 팔 할은 책에 돌릴 수 있겠다. 사실 눈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미련하게 책을 놓지 못했던 나에게 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책과 함께한 역사는 삼십 권짜리 위인전집으로부터 시작했다. 어떤 분이 우리 집으로 방판 영업을 했던 모양인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는 꽤 많은 쇼핑백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소망을 저버리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해서 나체로...' 같은 부분만 계속 읽었더랬다.
그 후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별다른 것 없이 만화책을 보고, 티브이에 빠져 살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눈 건강을 망치게 되기까지 책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마치 연인이"나 왜 사랑해?"라고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듯이. 그냥 어느 순간부터 책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 사랑은 일부 e북/오디오북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아직 여전히 유효하다.
무언가를 회피하기 위해 책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항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예민한 감각이 책을 읽을 때면 잠잠하게 가라앉았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책일수록 좋았다. 책 내용에 집중할수록 머리 아픈일과 담을 쌓는 셈이었으니까. 점점 책에 빠져들었다. 이쯤 되면 중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