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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ul 04. 2024

불행의 유전(遺傳)

[한국영화걸작선] #1 / 소름

'01 윤종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의 최대 위기는 다름아닌 오늘이라고 느끼는 바입니다. 거장들의 작품들조차 슬슬 대중들의 마음에 다가가기 힘들어지고(김태용의 '원더랜드'의 실패는 쓰라렸습니다) 영화매체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추락하는 2020년대가 한국영화의 막다른 골목이 되었다는 것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 학생의 신분이고 많은 한국영화를 일독하지 못하였으나(또한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지요)지금부터 약 20년 전 부터의 우리 영화들을 굉장히 사모합니다. 난 물론 05년생의 나이인지라 70년대까지의 작품들에 대한 접근 경험은 일천합니다. 그렇지만 80년대 90년대 그리고 00년대까지의 한국 영화의 흐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옛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도 충만했던지라 그 시대의 지점들은 여럿 경유한 적이 있습니다. 이장호, 배창호, 장선우 등 제겐 모두 흥미롭고 익숙한 이름입니다. 특히 이장호 감독님의 <바보 선언>은 문화예술 불모지 한국에서도 찰리 채플린 못지 않은 오리지널리티가 탄생할 수 있는 영화적인 기적에 대한 숨가쁜 체험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후로 이어지는 90년대에선 이명세 라는 이름이 떠오릅니다. 여러 싸구려 영화들과 독특한 작가 감독들 80년대의 선배들이 일군 토양 위에 90년대 말부터 봉준호, 박찬욱, 김기덕, 홍상수, 이창동 등 우리가 너무나도 친근한 거장들이 출현해 00년대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룩했습니다. 10년대까지도 보면 나홍진 김태용 등 실력파들이 즐비했죠. 개인적으론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809000의 한국 영화들이 더욱 매혹적인 건 이러한 주류의 흐름 사이로 여러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족적을 남기고 갔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임순례 감독님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던지,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라던지, 최동훈의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등 그날의 디비디 책장에는 재미난 작품들이 샅샅이 꽂혀 있습니다.


 여기서 날 가장 사로잡은 건 바로 신인 감독이었던 윤종찬의 <소름> 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 이후 상업성을 의식했는지 다시는 이런 작가 영화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보석같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소름>은 아주 개인적이지만 되려 보편적이기도 한 한국 사회에 대한 작가적인 통찰을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재표현해내는 굉장히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시네필들이 한국영화에 대한 실망만 늘어놓는 요즘, 나는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 숨은 걸작을 분석해고픈 마음에 공부 하루 공친 오늘 각 잡고 이 글을 써 봅니다.




한국의 아들들은 어디에 있는가 / 불행은 유전된다



 영화는 택시기사 용현(김명민 분)이 웬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에 이사를 오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시작할 때 부터 그가 까먹는 초코바라던지, 위 사진처럼 그가 툭툭 쳐 보는 적치된 자전거, 이소룡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리고 냉장고 속에 꽁쳐둔 귀금속은 하나같이 00년대의 청년기 한국 남성 용현의 '유아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70년대 생 한국 남성들의 아버지들은 경제 성장과 전진의 과제 앞에서 그들의 아들들에게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부인을 학대하고 가스라이팅 했습니다. 대한민국에뿌리깊에 박혀버린 유교 사상 그리고 가부장제는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그들을 남성 중심적 체제의 하수인으로 세뇌시켰습니다. 


 고아로 자란 용현의 뒷이야기는 영화 중반부 이발소 장면부터 은근히 암시됩니다. 미금 아파트 504호에서 한 남성이 자신의 부인을 살해하고 아들을 유기한 채 도망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불이 났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어떠한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여기서 반드시 용현이 그 남자의 아들일 것이라는 추측은 영화속에서 기능적으로 사용된 옆집 소설가(기주봉 분)캐릭터의 이질감이라던지, 그리고 그의 화상 흉터 등등으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용현이 여성을 살인하고 자손들을 내팽기친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서의 70년대생이라는 것은 내가 직시한 현실과 굉장히 닮아 있어 소름끼쳤습니다. 



 그렇게 단절된 부모의 관심,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란 용현은 결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평생 그 유아성을 지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살인과 광기에 가까워지고 좋지 못한 여자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의 유아성을 보여주는 여러 장치들 중 위에서 말한 물리적 상징들도 있겠습니다만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민속촌 또한 탁월한 소재입니다. 용현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같은 장소에 매번 데려갑니다(이는 백숙집 할머니의 대사로도 드러납니다). 똑같은 민속촌에 데리고 가 똑같은 이소룡의 발차기를 선보였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친구를 나만의 장소로 데려가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곤 선영이 신발끈을 묶게 되자 웬 항공기 소리가 삽입되는데(타르코프스키 같은 연출일까요? 매우 탁월했습니다). 이는 용현이 남자로서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것과 잃어버린 엄마를 찾았다는 유아적인 기쁨을 중의적으로 암시합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부모와 생에 대한 박탈감을 메꿔줄 '수단'으로서 기능합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 자란 아들들은 커서 똑같이 여자를 자기를 위한 수단 취급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처럼 똑같이 여성을 학대합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이성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발굴한 엄마 품에 다시 안기는 것입니다. 그 시절 한국 남자들에게 있어서 여성은 타자화된 일종의 출구 혹은 경과구 그 이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름>은 이런 우악스런 여성혐오의 되풀이를 낱낱이 스크린에 현시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깊은 비애를 자아내는 것은 마지막에 용현이 냉장고에서 떼어 내는 둘의 스티커 사진이였습니다. 그들은 젊은 연인들이지만 왜인지 이상하게도 사진 속에서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색한 모자의 사진과도 같아 보입니다. 전처럼 또 여자를 죽인 용현은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사진을 허탈하게 바라봅니다. 그는 다시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소름>이 택하는 소재들이나 심볼들은 굉장히 세련되고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미장센의 중요성을 말할 때 이 영화가 딱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밀로스 포먼의 <금발 소녀의 사랑> 속 스트라이프 넥타이 만큼이나 <소름>은 아찔한 미장센을 제시합니다.





"정신병도 유전이라던데..."


 <소름> 속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폭력의 대상이 되지만 반대로 폭력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이 엄마의 귀신이 이 아파트를 떠돌며 복수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설가의 말은 두렵습니다. 김명민 씨는 인터뷰에서 열연을 펼치면서도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도 한 것이 <소름>의 주인공들과 영화 속 소설가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는 톱니바퀴 돌아가는 맞물리며 중첩되기에 나 또한 한 번 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내 해석을 말해보자면 용현은 30년 전 아내를 죽인 그 남자이기도 하면서 그 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선영은 그 부인이기도 하면서 그 남자의 다른 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20세기 한국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불행의 유전' 을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남편에게 끊임없이 가정폭력을 당하고 아들을 잃어버린 선영은 30년 전 비극의 여성이자 그 남편의 딸입니다. 선영은 지독하리만치 억압당했던 한국의 여성들을 대유하는 인물입니다. 선영 하나로 40년대 70년대 그리고 00년대의 여성들이 겪었던 여성혐오를 영화는 다층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선영은 결코 선배 여성들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칼을 맞아야 했지만 오히려 선영은 자신의 남편을 되려 살해해 버립니다. 남편을 죽이고 용현 뒤에 나타난 그녀는 마치 소설가가 말한 '엄마 귀신'의 모습 같습니다. 귀신의 원혼이 폭력적인 가장을 살해하는 '복수'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또한 그 복수엔 가장의 아들인 용현의 도움이 개입됩니다. 따라서 그 폭압적 가장의 아들딸들이 그를 죽여낸 것입니다. 


 선영과 용현이 똑같은 굴레 속에서, 학대를 당하고 여자를 폭행하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유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마치 저주만도 같았던 한국의 아버지를 살해해 버리는 서사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관객은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잘 살수 있게 된 것 아니냐? 왜 후반부에서 그들은 서로를 죽이려 들고 결국 용현은 선영을 없애 버리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는 <소름>의 매우 염세주의적인 면모를 꼬집는 날카로운 질의입니다.


 둘은 성관계를 가진 후(약간의 근친상간의 뉘앙스가 있죠) 담배를 피며 허심탄회하게 잡담합니다. 거기서 선영은 자기 아버지가 미쳐버려서 집을 나간 후 다신 안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덧붙입니다. "정신병도 유전이라던데..." 아버지를 살해해 버린 깔깔 웃는 둘은 그 햄스터 쳇바퀴 같은 유전의 악령이 자신들을 덮칠 것이라는 것을 결코 예상하지 못합니다. 


 후에 말하겠지만 그들의 관계는 살인으로 맺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렇게 가정폭력의 아픔을 극복해 낸 것 같은 두 남녀는 지독하리만치 씻겨 내려가지 않는(김명민 씨가 샤워를 자주 하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입니다)광기를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이는 유년의 트라우마가 죽을 때까지 인간의 발목을 잡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결국 한 번 시작된 불행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굉장히 염세적이고 우울한 주제의식을 제시합니다. 살인 직전의 모텔에서 선영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가지만 쉽사리 씻을 수 없습니다. 그 악몽은 살인의 세례로도 결코 정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나와 용현에게 다시 그냥 일을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치유 불가의 암덩어리들을 몸소 확인한 후 결국 친족 살해, 여성 살해라는 지옥같은 불행의 유전에 다시 동참하게 됩니다. 엄마 귀신은 아들을 조종해 그렇게 자신의 딸을 죽여 버립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같은 착시를 드는 엄마 귀신의 이 복수는 여자들 또한 그 광기를 평생 지니며 살아간다는 우울함을 나에게 건넵니다. 그렇게 가장 한국적인 공간인 '아파트'에서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가 되풀이됩니다. 왜 이 영화 속 아파트가 극찬을 받는지 이해가 가실까요?


 그 회복 불능, 치유 불가, 갱생 금지의 70년대생의 아들인 나 또한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거 같아 가끔 소름 돋을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처럼 나도 무기력하고 불행하게 청년기를 보내면 어떡하나" 밤마다 좋지 못한 꿈을 꾸는 듯 생각합니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악취는 루저들의 가계도를 따라 영원히 추적추적 내립니다. 상당히 비관적이죠.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만큼의 어두움을 가진 영화는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상실 그리고 불신



 아들이 타던 자전거를 선영은 유심히 바라봅니다. 아까 용현이 발로 툭툭 차보던 그 자전거입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는 무서운 아파트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름>은 내가 말한 대로 사회 고발극이기도 하지만 상실과 무력함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윤종찬 감독님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된 개인적인 아픔을 이 영화에 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무섭기도 잔인하기도 하지만 왜인지 모를 비애가 느껴지는, 굉장히 슬픈 영화로 느껴졌습니다. 


 <소름>의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부모, 혹은 자식, 남자 친구... 두 남녀 외의 은수나 소설가도 모두 가까운 사람들의 부재를 겪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감독 개인의 그 경험이 각본에게까지 끼친 영향일 것입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심정은 편의점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온갖 물건들로 형상화됩니다(칸쵸가 2001년에도 있던 건 처음 알았군요!). 나 또한 그런 건조함을 매일 겪는 사람이라 영화 속 편의점이 공간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매우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용현이 햄스터와 짐보따리를 들고 욕을 하며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 쇼트들입니다. 슬로우 모션이라는 간단한 테크닉만 쓰였을 뿐인데 용현의 그 모습은 마치 귀신 들린 아파트 혹은 게임 속 악령의 던전을 빠져나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가 택시 기사라는 것은 이젠 <택시 드라이버> 이후로 꽤 명백한 설정입니다. 끊임없이 가는 곳마다 트라우마의 분출을 겪어야만 하는 그의 생은 엄마를 잃어버린 채 공허하게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택시 운전수의 삶으로 비춰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오는 엄마 귀신의 자장가는 인간에게 있어 부재와 상실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가를 제대로 상기시킵니다. 용현은 엄마를 찾고자 끊임없이 떠돌지만 여성들은 애인이 되줄 수 있을 지언정 어머니가 되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들은 커서도 삶을 둥둥 부유하게 됩니다. 


 공포와 가장 잘 맞는 감정은 다름아닌 슬픔입니다. 난 슬픈 공포 영화야말로 공포를 정말 완벽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재와 결핍의 메타포를 쓸쓸한 염세로 담아내는 이 영화 정말로 훌륭하군요.



 또 하나 이 영화의 키워드는 바로 불신입니다. 사실 <소름>은 인간 관계의 삐걱거림을 다루는 일종의 부조리극이기도 하죠. 굉장히 인상적인 비유로 이 영화에서 햄스터 케이지가 등장합니다. "햄스터 한 마리 키우다가 외로울 것 같아서 한 놈 더 넣어 주잖아? 그럼 바로 물어뜯어 버리거든..." 이라는 용현의 대사는 사실 둘의 관계, 더 넘어서 영화 전반적인 인물들의 관계를 집약합니다.


 요즈음에 한국에서까지도 계속 확인되는 소통의 불가능성은 내가 한국인으로써 느끼는 한국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서로 대화를 못합니다. 흔히 듣기가 결여되었다고 하죠. 영화의 대본은 이런 한국인들의 특징을 잘 담아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괜히 한다던지, 꺼림직한 일을 괜히 숨긴다던지... 작은 오해들이 하나하나 쌓여 파국에 이르러 버리는 대인관계의 비극성을 재현합니다. 


 용현과 선영의 관계의 분기점은 바로 선영이 용현의 냉장고에서 귀금속을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때서야 그는 용현의 '수단적 가능성'을 깨닫습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항상 공평하진 않아서, 때때로 그것이 매우 수직적이거나 최소한은 기울어져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때가 많죠. <소름>의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선영은 금반지를 훔치고 용현의 수상함을 캐묻는 은수에게 "이젠 나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라고 말하며 용현에 대해 독립적으로 되겠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이를 엿들은 용현은 분노에 가득 차 적치물들을 마구 발로 까댑니다. "너가 어떻게 나한테 감히 이래?"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라는 말은 정말 한국 사람들의 대표적인 말싸움 레파토리 넘버 원일 것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엇나감들의 누적은 관객에게 귀신보다도 주인공들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더 무섭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분출. 용현은 모텔에서 정말 말 그대로 "너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라며 겁박합니다. 결핍된 이들은 부풀린 자의식을 껴안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겐 한 번의 무시도 허락되지가 않죠. 상처받은 이들의 특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도 사람이고 평생 둥가둥가 해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용현, 남자들의 여친들은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들이고, 종국엔 희생당합니다. 


스티커 사진을 떼어 바라보는 용현의 표정에선 "우리가 이렇게 좋았을 때도 있었는데..." 라는 죄책감이나 회한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핍된 인간들의 연애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려 버리고 연속된 소통 불가능의 해제들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자기 주장을 간신히 똇목 삼아 떠내려 가버립니다. 




공포 영화의 문법


 

 윤종찬 감독은 <소름>이 결국엔 호러영화는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물론 나도 이 영화가 전통적 호러의 신택스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 다른 말은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공포영화의 문법들 그리고 분위기와 소재들은 이 영화가 그 형식을 차용해 새롭게 재창조한 드라마라고 하고 싶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소름>은 공포 영화의 문법으로 만든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중간중간 시의 후렴처럼 삽입되는 숏들이 있습니다. 위에 장면처럼 갑자기 병이 깨지는 걸 보여준다던지, 갑자기 카메라 앞에 대형트럭이 지나간다던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며 장면이 전환된다던지 말입니다. <소름>에선 귀신이 아니라 감독이 관객을 놀래킵니다. 이렇게 의도적이지만 은근한 점프 스케어는 이 영화의 무서움(?)을 공포영화의 그것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래도 느껴볼 수 있는 장르성을 확보하면서 시적인 운율을 형성합니다.


 사운드도 그것에 한 몫 합니다. <소름>은 청각적인 요소에서도 공포영화의 문법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물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절제된 음악 그리고 중간중간 들려오는 피아노 학원에서의 아이들 소리 피아노 소리는 정말 대단합니다. 많은 감독들이 영상을 잘 찍어도 사운드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름>은 사운드가 되려 더욱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 높게 기술적으로도 잘 짜여진 영화입니다. 언젠가 다시 극장에 개봉되면 꼭 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시청각적인 설계가 빼어난 영화입니다. 


 또한 클리셰를 다루는 능력도 대단합니다. 공포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등의 깜빡거림이라던지, 험상궃게 내리는 폭우 같은 것들은 이젠 너무 뻔해서 되려 찾아보기 힘든 요소들입니다. <소름>은 이런 낡은 상투요소들을 가져와 굉장히 인상적으로 재활용합니다. 전등의 깜빡거림이 일어나는 때면 항상 영화에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처음과 마지막, 살인, 혹은 광기의 분출 등등 결정적인 순간엔 왜인지 모르게 비가 쏟아지고 아파트 전등이 말썽인 것이 제시됩니다. 나는 이렇게 기존 장르 영화의 형식들을 빌려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좋아합니다. 이것이 내가 뱀파이어 영화나 호러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유입니다. 장르의 변주가 굉장히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소름>은 내가 본 공포영화들 중 가장 독창적이고도 신선한 영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영상미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소름>의 영상들은 회색조와 암흑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나는 그것이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영화들의 반대급부로서 어떠한 극단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둡고 무시무시한 영상미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파트 내부를 촬영한 것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미술의 도움도 물론 있었겠지만은 빛의 사용을 극단적으로 줄인다던지(윤종찬 감독은 스탭들에게 왜 이렇게 화면이 어두워야 하는지 에 대해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시종일관 암흑으로 몰아붙인다던지 하는 영상적인 극단성은 꽤 독특했습니다. 


 숏 하나 하나의 어떤 질감 그리고 구도와 배열 모두 훌륭합니다. 위의 장면은 제가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꼈던 많은 숏들 중 하나입니다. 허름하고 낡아빠진 뒷골목의 배경 너머 고층 빌딩이 하나 우뚝 서 있는 서울의 풍경입니다. 저 구도 하나만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한국의 근대화와 대비되는 더러운 변두리는, 물질적으론 풍요로워져도 마음이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들을 대유한다던지,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세상과 유리되어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표현한다던지 등 영화가 괜히 카메라의 예술이 아니라는 점을 정확하게 짚습니다. 윤종찬 감독은 정말 참 예술가라는 걸 다시 한 번 더 느낍니다.





수미상관으로 제시되는 미금 아파트의 풍경 뒤로 크레딧이 등장하며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소름>은 이처럼 가장 한국적인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 시절은 정말 낭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 영화처럼 어두운 이야기여도 하고 싶다면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영화가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코리안 시네마의 극점을 달리고 있는 <소름>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볼 때면 어린 시절 부모님과 늦은 시간에 같던 지하상가의 질감 같은 것들이 엄습합니다. 나 또한 이런 불행의 굴레의 일원인 것일까요. 이 영화의 텁텁함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몇 년 생으로서, 이 영화를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소름>은 한국 사회의 가장 어두운 면모를 여과없이 재현하는 회고록이자, 상실과 비애에 대한 가장 개인적인 증언이기도 하며, 매혹적인 영상으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마지막 예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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